[박세리의 그린수기]20.세계무대 연 삼성과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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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요즘 나와 삼성과의 계약금 조정에 대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듯하다.

계약이 어떻게 매듭되든 그것은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하겠지만 사실 나는 삼성측에 많은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나와 삼성과의 첫 대면은 내가 여고 3학년 때인 95년 한국여자아마추어선수권 대회 중에 이뤄졌다.

삼성 골프팀을 담당해온 안호문 (이사급) 담당과 정환식 과장이 나를 찍었던 것이다.

정과장이 경기가 열리고 있는 경기도 기흥 골드골프장으로 아버지를 찾아와 면담을 신청했다.

아버지는 경기에 한창 신경쓰느라 "다음에 경기가 끝나고 만나자" 며 거절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정과장은 그때 좀 당황스러웠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과장도 축구선수 출신이라 경기 중엔 경기에만 몰두하는 우리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의 말을 오해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한다.

정과장은 우리를 4시간이나 기다려주었다.

4시간 후 만난 자리에서 삼성측은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며 나를 세계적인 선수로 키우는데 아낌없는 지원을 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삼성 이건희 회장님은 열광적인 골프 애호가로 우리나라 골프가 세계무대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하고 유망주를 찾아보라고 지시하셨다 한다.

당시 삼성은 미국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오태근 (미국명 테드 오.코오롱) 오빠 등 여러 선수를 놓고 저울질하다 남자보다는 여자가 승산이 있다고 판단해 나를 점찍었다고 한다.

삼성은 일등주의를 표방하면서 공격적인 경영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의 승부욕.투지와 딱 맞아떨어졌다는 뒷얘기도 있다.

어쨌든 당시 우리집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아버지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처럼 내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나는 국내무대로는 도저히 성이 차지 않았다.

도약하고 싶었고 더 넓은 무대에서 내 실력을 펼치고 싶었다.

삼성측은 계약금.연봉 외에 국내외 대회 출전경비와 훈련비 등 일체의 지원을 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나를 삼성직원으로 채용한다고 했다.

나보다 더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돈도 돈이지만 그동안 나를 지도해온 아버지식 훈련방법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나와 삼성은 95년 10월 17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공식 후원계약을 체결했다.

삼성측에서는 분당에 61평짜리 아파트도 전세로 얻어줬다.

그날 밤 아버지는 "세리야, 이젠 됐다.

너도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온거야" 하며 흥분하시던 모습이 새롭다.

1년 뒤인 96년 12월 19일 나와 삼성은 연봉 1억원.계약금 8억원이라는 구체적인 액수로 10년 재계약을 했다.

닉 팔도.닉 프라이스 등 세계적인 선수를 지도해온 골프코치인 데이비드 레드베터에게 1년간 골프연수를 시킨다는 조건도 붙었다.

삼성에서는 당시 나의 메이저대회 우승을 5년 후께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97년 1월 17일 나는 마침내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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