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장 선출된 박준규의원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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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박준규 자민련고문의 국회의장 당선은 개인적으론 명예회복의 성공이다.

朴신임의장은 이미 90년대 초반 국회의장을 두차례 연임했다.

13대 후반기인 90년 6월부터 92년 5월까지와, 14대 전반기인 92년 6월부터 93년 3월까지가 그것. 그러나 두번째는 재산공개 파문으로 국회의장직을 불명예스럽게 떠나야 했다.

나어린 아들 (69년 - 13세)에게 물려준 속칭 '벌집' (75세대 다가구주택) 이 문제가 됐다.

'양지 (陽地)에서 살아온' 朴의장이기에 이같은 고통은 참기 어려운 것. 그래서 개인적으로 이번의 입법부 수장자리는 의미가 남다르다.

그는 대구 성당못 근처에서 과수원과 양조장을 운영하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아쉬운 것 없이 살아왔다.

일제시절 일본유학을 했고, 해방후에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했고, 6.25중에는 미국에서 유학했다.

그리고 정치꿈을 버리지 못한 선친 (朴魯益.제헌의회와 2대 국회에서 낙선) 의 꿈을 이어 4.19 직후인 60년 5대 국회의원 (민주당)에 당선, 정치권에 들어섰다.

이후 정치행보는 본인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양지밟기였다.

그는 5.16 이후 여당인 공화당으로 옮겨 당의장서리까지 지냈다.

그 바람에 80년 5.17로 정치규제에 묶였으나 87년 노태우 (盧泰愚) 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치권으로 복귀했다.

집권세력 내부의 권력 갈등속에 5공세력이 밀려나면서 여권의 원로 (元老)가 됐고, 민정당대표와 국회의장을 지냈다.

그러나 5년 뒤 YS가 집권하자마자 '팽 (烹)' 당한 것이다.

朴의장은 이후 틈틈이 YS정권을 비판하면서 명예회복을 도모해왔다.

이를 위해 그는 JP 및 DJ와의 협력을 모색했다.

95년 그는 역시 민자당에서 밀려난 JP가 자민련을 창당할때 TK의 대부라는 이미지로 합세했다.

그리고 15대 총선에서 당선돼 재기에 성공했다.

이어 97년 대선과정에서 DJT후보단일화, 즉 김대중후보를 밀기 위해 "후보단일화가 안되면 자민련을 탈당하겠다" 며 후보단일화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가 국회의장자리를 DJ로부터 약속받을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JP와는 소원해졌지만 어쨌든 자신의 명예회복에는 성공한 것이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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