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 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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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4장 서까래를 치면 기둥이 운다

"어째서 주먹질을 당했는지 알고나 있소?" 그제서야 윤씨의 윗도리 자락에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윤씨가 태호에게 담배를 청했다.

멀리로 부두에 정박한 오징어 채낚기 어선들의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그러나 윤종갑은 이렇다 할 대꾸가 없었다.

"옛날의 보부상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엄중한 규율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 같은 모리배 (謀利輩) 는 멍석말이라 해서 멍석으로 덮어 씌워 눈을 가린 뒤 여러 동료들이 둘러싸고 가차없는 몽둥이 찜질을 했소. 눈을 가렸기 때문에 누가 몽둥이질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목숨을 잃어버릴 때가 허다했었소. 그래도 목숨이 붙어 있으면 챗장이라 해서 보부상의 신분증을 빼앗고, 보부상의 대열에서 영원히 내쫓아버렸소.

물론 몇 백년 전의 옛 사람들이 그런 혹독한 징벌로 기강을 세우고 상도덕을 바로잡아 왔다 해서 흉내낼 것은 아니오. 하지만 당신이 저지른 행위로 봐선 몽둥이 아니라 권총이 있으면 쏴버리고 싶소. 아무리 잇속에 눈이 어두워졌다지만 형제간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의 잇속을 몰래 가로챈단 말이오? 우리가 종잣돈이 든든한 도매상도 아니고 끽해야 푼전이나 바라는 잡살뱅이 행상꾼들 아닙니까. 세상이 아무리 혼탁하고 더러워졌다지만, 당신 같은 쓰레기를 동업자로 알고 고락을 같이해 왔다는 사실이 소문날까 겁나요.

주먹질을 당했다고 해서 간사스런 버릇이 고쳐질지 의심스럽다는 게요. " 철규에게 훈계를 당하고 있는 동안 윤종갑은 흡사 길들여진 암코양이처럼 태호가 건네준 화장지로 얼굴의 핏자국을 닦아내고 옷매무새도 고쳤다.

철규의 말을 달갑게 듣는 것 같기도 하였고, 건성으로 흘리는 것 같기도 했다.

속시원하게 사과하고 철규의 처분을 기다리겠다는 말 몇 마디면, 소동은 일단락될 듯한데도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바지주머니에서 구겨진 담배를 꺼내 불을 달아 물었다.

담배를 피우며 마음을 가라앉히는데도 윤종갑은 억울했다.

더욱이나 50년 가까이 뿌리 박고 살아온 본바닥 토박이가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뜨내기에게 아야 소리 한번 못 질러보고 고스란히 구타를 당했다는 것이 스스로 모멸스러울 정도로 분통이 터졌다.

차라리 당사자가 변씨였다면 가슴이 메도록 억울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의 뇌리에는 안면을 두고 있는 실력자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언뜻 떠오르는 얼굴들만 헤아려도 대여섯이나 되었다.

그와 함께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한철규에게 구타를 당할만큼 고약한 일을 저지른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한씨네 행중으로 돌아야 할 잇속을 중간에서 가로챘다는 사실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도의적으로 약간의 하자가 있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남의 물건을 대가도 치르지 않고 탈취를 했다거나, 값올리기를 고의적으로 조장하기 위해 매점매석을 했다거나, 정어리를 고등어로,가자미를 광어로, 낚지를 오징어로, 연안태를 원양태로 속여 팔았거나 중개해준 적은 없었다.

법을 어기고 잇속을 챙긴 일이 없는데도 지금 자기는 억울하게 구타를 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니 윤종갑은 억울하고 분통 터져 자신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솟아올랐다.

"사내답지 못하게 왜 웁니까. 눈물을 보인다 해서 이미 서로 결별하기로 결정한 일을 번복할 수는 없어요. 가혹하다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과는 사과대로 받아들이겠지만, 결정한 일을 하루도 못돼서 흐지부지할 수는 없습니다.

진부령 안사장네 물건을 서울로 빼돌린 것을 알았을 때만 해도 결별할 생각은 없었지만 우리가 수집하라고 신신당부한 반건조 오징어까지 몽땅 도매상에 넘기고 말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치가 떨렸어요. " 그때서야 윤종갑은 가소롭다는 듯 철규를 치떠보며 되받았다.

"이봐, 한선생. 속 모르는 소리 좀 작작 씨부려. "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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