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정재의 시시각각

기업 투자 확 늘리는 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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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정권마다 방법은 달랐다. 군사독재 시절엔 그냥 “투자가 필요해”로 족했다. 그러면 기업들이 알아서 계획도 세우고 돈도 조달했다. 가끔 반항하는 기업은 ‘즉결 처분’하면 그만이었다. 문민정부 들어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어르기보단 뺨 치기가 주였다. 기업의 힘이 커져 대권까지 넘보자 괘씸죄가 보태졌다. 당시 혹독하게 고생했던 모 그룹은 대통령 입에서 ‘투자’ 소리만 떨어지면 다음날 당장 30%를 늘린 투자계획을 발표해 성의 표시를 하기도 했다.

기업을 가장 잘 다룬 이는 아마도 김대중(DJ) 전 대통령일 것이다. 능수능란. 어르고 뺨을 쳤다. 큰 힘을 쓰지도 않았다. 당선자 시절 재벌 총수들을 불러모아 한 차례 뺨을 때렸을 뿐이다. ‘사·재·출·연’. 이 한마디에 재벌들은 줄줄이 사재를 털어야 했다. 은행 빚을 많이 쓰고 있는 데다 경영 잘못한 죄, 회사 돈 빼먹은 죄까지 얹어지는 통에 당시 재벌들은 DJ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DJ 집권 2년차 만에 90여 건의 사재 출연이 이뤄졌다. 반(反)시장 정책인데도 국민적 저항은 없었다. 경제 살리고, 국민 세금 아끼고, 악덕 기업주 혼내 준다며 되레 박수를 받기도 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본시장의 꽃인 주주의 권리를 이렇게 박탈하고도 권좌에서 박수받으며 내려온 이는 DJ가 유일할 것이다(요즘 DJ는 부쩍 자신의 통치기간을 민주주의가 꽃핀 시절이라고 주장하는데 당시 기업인들 생각은 좀 다를 것 같다).

기업들의 절치부심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다. 돈을 쌓기 시작했다. 은행 빚은 가능한 한 줄이고 현찰을 늘렸다. 무리한 투자는 삼갔다. 쓰지 않고 쌓아둔 상장사 잉여금은 지난해 말 현재 391조원이나 됐다. 건물·토지·설비 등을 뺀 현금성 자산만 약 20%(80조원)쯤 된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어르고 뺨 칠 구실을 주지 말자며 기업들이 이를 악문 결과물이다. 그런 결과물이니 누가 달랜다고 선뜻 내놓기 어려울 것이다. 대통령이라도 마찬가지다.

당장 고 노무현 전 대통령부터 애를 먹었다. 기업도시다 뭐다 의욕적으로 일을 벌였지만, 투자하는 기업이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어르거나 뺨을 치진 않았다. 그렇게 기업 따로, 대통령 따로 5년이 흘렀다. 딱한 사정은 이명박(MB) 대통령에게도 이어졌다. MB는 지난 주말 야심 찬 유인책을 내놓으며 기업들의 투자를 요청했다. 규제도 풀고, 돈줄도 열고, 세금도 깎아 주기로 했다.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막을 대책도 마련해 주기로 했다. 몇 년 전부터 기업들이 “이것만 해주면 투자를 확 늘리겠다”던 바로 그 요구사항들이다.

그런데도 기업들 반응이 영 시큰둥하다. 주로 말꼬리 흐리기 형이 많다. “경기가 워낙 불투명해서…” “내 코가 석 자라…” “상황을 더 지켜봐야…”, 개중 나은 응답이 “생각해 보겠다” 정도다.

어려운 기업 사정 모를 바 아니나 MB로선 속상할 만하다. 막상 요구를 들어줬더니 하겠다던 투자는 시치미를 떼고 있으니 화도 날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투자했다 실패하면 책임은 온전히 기업들 몫인 걸. 대통령이 대신 물어줄 순 없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라 해놓고 뺨을 치기도 그렇다. 친들 효과도 기대난망이다. 그렇다면 답은 뻔하다. 기업들 스스로 투자에 나설 때까지 자꾸 멍석을 깔아 주는 거다. 혹 아는가. 그렇게 해서 세상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면 투자가 온통 한국으로 몰려 들어 평생 누구나 일자리 걱정 없는 나라가 될지.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