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대통령과 집권당 총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며칠전 같은 날 신문에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에 관한 두가지 기사 (記事)가 실렸다. 하나는 金대통령이 새로 지은 판문점의 '자유의 집' 현판을 써달라는 통일부의 요청을 사양했다는 기사였다.

金대통령은 자기는 5년 임기의 대통령인데 퇴임후 현판을 바꾸자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으므로 퇴임후에도 존재해야 할 건물에 상처를 남길지도 모를 일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는 金대통령이 취임후 처음으로 국민회의 의원들에게 1백만원씩 격려금을 주었다는 기사였다. 金대통령이 현판쓰기를 사양한 것은 정말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역대 대통령이 중요 공공건물이나 시설에 휘호를 남겼다가 퇴임후 철거되는 수모를 겪는 일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어떤 관공서는 지금도 한 전직 대통령의 휘호를 지우지는 못하고 '대통령' 이라고 쓴 그 이름만 대형 화분으로 가려놓고 있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다.

金대통령이 현판쓰기를 사양한 것은 그만큼 대통령직 수행을 겸허하고 조심스런 마음자세로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영화와 권세가 천년 만년 갈 것처럼 전국 곳곳에 자기 글을 새겼던 과거 대통령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여주는 일이다.

金대통령이 소속의원들에게 격려금을 준 것은 대통령 아닌 당총재로서 한 일일 것이다. 국민 정서엔 안맞지만 정치관행으로 보아 별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 두 기사에서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으레 집권당총재이기도 한 대통령이 대통령과 총재라는 두가지 역할에서 균형을 어떻게 잡고, 업무의 구별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국민통합의 상징이요, 전국민의 대표다.

그는 자기에게 투표하지 않은 국민을 포함한 전국민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며, 특정지역.특정정파 (政派) 를 초월해야 한다.

반면 집권당총재인 그는 야당과 경쟁하고 그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파를 초월해야 할 의무와 특정정파의 승리를 이끌어내야 할 책임, 이 두가지 상반되고 모순되는 책임을 대통령 한사람이 동시에 지고 있는 것이다.

선거를 예로 들면 대통령으로서는 초당적으로 엄정관리를 해야 하는 반면 집권당총재로서는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입장이다.

엄정한 대통령이 되면 자칫 집권당이 섭섭해 하기 쉽고, 당총재의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국정을 자기당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행함으로써 국정의 엄정성이 흔들릴 우려가 있다.

지금껏 우리는 대통령과 당총재라는 두가지 역할에서 균형을 잘 잡고 구별을 잘 해낸 대통령의 모범을 볼 수 없었다.

역대 대통령들이 이 문제에서 모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李承晩) 대통령은 자유당을 편들고, 자유당 승리에 집착한데서 비극을 몰고 왔다. 지금은 다수국민의 존경을 받는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도 공화당을 편들고 야당을 탄압했다.

朴대통령은 67년의 7대총선때 당시 야당의 투사였던 김대중의원을 낙선시키기 위해 직접 목포에까지 가 현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까지 했다.

그런 탄압 속에서도 金의원은 당선됐지만 朴대통령은 이로 인해 크나큰 이미지 손상을 입었다.

최근의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도 사사건건 야당에 이기려고만 하고 의원 빼내오기에 직접 나서는 등 비난을 받았다.

이런 과거사가 말해주는 분명한 교훈은 대통령이 지나치게 정파적 입장에 서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우리의 정당들은 아직도 미숙하고 전근대적 요소를 많이 안고 있다.

그런 정당들간의 정쟁 (政爭) 또한 미숙하고 유치하고 저급 (低級) 한 수준이다.

최근 사례만 봐도 뻔하지 않은가.

인신공격.저질언어.흑색선전이 그렇고 정쟁의 테마 역시 의원 빼가기.국회요직 서로 먹기 등으로 국민불신과 경멸 대상이 대부분이다.

국가적 지도자로서 국민신뢰를 한몸에 받아야 할 대통령이 이런 저질정쟁에 개입했다가는 자칫 이미지와 신뢰손상을 입기 십상이다.

그런 정파적 지도자의 입장보다는 야당까지도 설득해 한방향으로 같이 가는 국가적 지도자의 입장에 설 때 성공한 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을 외국 사례들은 보여준다. 국난 (國難)에서 각기 나라를 구한 루스벨트.처칠이 그런 예다.

우리 역시 지금 어느 때보다 정파적 지도력이 아닌 국가적 지도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국난을 맞고 있다.

대단치도 않은 현판쓰기까지 사양한데서 보인 겸허하고 조심하는 그런 마음자세로 金대통령도 정파 아닌 국가적 지도자로서의 리더십 발휘에 전념하길 기대한다.

송진혁(논설실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