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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근의 잊혀진 세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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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10면

얼마 전 이근배는 한 시 잡지와의 대담에서 “중학교 때 방인근의 소설을 많이 읽고 처음에는 소설가가 되려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다소 농담이 섞여 있는 듯한 말이었지만 실제로 1950년대에 방인근의 소설을 ‘탐독’한 청소년들은 많았다. 해방 후 애정·추리·탐정·공상 등 대중소설에 몰두한 방인근은 50~60년대에 걸쳐 무려 100권 가까운 소설들을 내놓았다. 그 가운데서도 ‘장미’가 등장하는 선정적인 소설들과 ‘장비호 탐정’이 활약하는 탐정소설들의 인기가 높았다.

정규웅의 문단 뒤안길-1970년대 <21>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그 무렵 『벌레 먹은 장미』라는 아주 ‘야한’ 소설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읽히고 있었다. 대개는 표지가 뜯겨진 채 나돌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어른들에게 들키면 혼쭐이 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작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누구나 방인근의 소설임을 의심치 않았다. 방인근의 ‘벌레 먹은 청춘’과 ‘장미부인’이 오버랩되면서 나타난 혼동 탓이었다.

그러나 그 소설은 방인근이 아닌 최인욱이 썼다. 아직까지도 『벌레 먹은 장미』를 읽었던 대부분의 사람은 그것이 방인근의 소설이라 믿고 있다.

어쨌거나 그 방인근이 75년 1월 1일 파란만장한 삶의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19세기 태생(1899년생)의 마지막 문인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때 백만장자였다가 몰락한 한 대중작가의 비참한 말로’로 축약되고 있었다. 물론 한국문학 초창기에 문예지 ‘조선문단’을 창간하는 등 그가 기여한 공로에 대해서도 언급되기는 했지만 그것은 곁가지에 불과했다.

충남 예산 태생의 방인근은 부친이 포목상 등을 운영해 큰돈을 벌어놓고 사망한 덕으로 청년기까지도 유복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아오야마학원을 거쳐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하려다 낙방한 그는 그 무렵 사귄 전영택 등 조선 유학생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귀국하면서 문학판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전영택의 여동생인 전유덕과 결혼하고 이광수와 친교를 맺은 뒤 1924년 2만원이라는 거금을 쾌척하여 ‘조선문단’을 창간했다. 편집에 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은 이광수에게 맡겼다.

방인근보다 일곱 살이 위인 이광수는 자신의 아호인 ‘춘원’에서 ‘춘’자를 따 방인근에게는 ‘춘해(春海)’, 그의 아내에게는 ‘춘강(春江)’이라는 호를 지어줄 정도로 가까웠다. 하지만 편집에 관한 의견 충돌로 이광수가 손을 떼고 난 후 5호부터는 방인근이 편집을 주도했다. ‘조선문단’은 채만식·박화성·최학송·이장희 등 신인들을 배출해낸 공로도 공로지만 무엇보다 김동인의 ‘감자’, 나도향의 ‘물레방아’,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등 수많은 문제작을 잇따라 발표해 초창기 한국문학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문예지였다.

그러나 2~3년이 지나면서 ‘조선문단’은 재정난에 허덕이기 시작했다. 그 자체로서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운영자금을 염출해낼 수 없을 정도로 방인근의 재산이 바닥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당한 재산을 이복동생에게 빼앗긴 데다가 주색에 탐닉하는 등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호방한 기질 탓이었다. 휴간을 거듭하다가 ‘조선문단’을 종간한 뒤 재기를 노려 29년 ‘문예공론’을 새로 창간하기도 했으나 몇 호를 버티지 못했다.

방인근이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34년 동아일보에 ‘마도의 향불’을 연재하면서부터였다. 뒤이어 ‘새벽길’ ‘방랑의 가인’ 등 낭만적 대중소설을 발표했지만 소설가로서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54년 가산을 정리하여 설립한 ‘춘해영화사’도 오래 버티지 못했고,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대중소설들도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판매되지 못했던 탓에 그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그는 몇 달에 한 차례씩 셋집을 옮겨 다녀야 하는 딱한 처지가 돼 가고 있었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방인근은 당시 문협 이사장이던 조연현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장 입원을 하든지 약을 먹든지 하면 수명을 조금은 연장할 것 같은데 그럴 돈이 없어 날마다 울음으로 세월을 보냅니다…’. 편지를 받은 조연현은 곧 윤주영 문공부 장관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윤 장관은 5만원이 든 봉투 네 개를 만들어 역시 딱한 처지에 있던 김광섭·이봉구·박기원 등 네 문인에게 전달하도록 했다. 하지만 방인근은 이 돈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중앙일보 문화부장·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문학 평론가로 추리소설도 여럿 냈다. 1960년대 문단 얘기를 다룬 산문집 『글동네에서 생긴 일』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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