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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통령 “좌파 정책이라도 국민에 이익 되면 배워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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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호 03면

이명박 대통령이 3일 강원도 원주시 원주정보공고를 방문해 수업을 참관한 뒤 구내식당에서 학생들과 함께 음식을 담고 있다. 원주=오종택 기자

이 대통령의 중도강화론은 지난달 22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나왔다. 매주 목요일 하던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를 이슈 선제 시스템으로 바꾸겠다며 월요일로 옮긴 뒤 처음 열린 회의였다. 조문 정국 이후 인적 쇄신과 국정 운영 방식의 변화를 안팎에서 요구받던 이 대통령의 대응은 ‘중도를 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방미 전 그가 말한 ‘근원적 처방’을 놓고 보수대연합이나 충청연대론, 선거구제 개편 등을 점쳤던 세간의 예상을 깬 것이다.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반전의 정치, MB의 ‘중도 강화론’

-정확한 발언 내용은 뭐였나.
“‘좌파 정책이라도 국민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게 있다면 배워야 한다. 중도 입장에서 좌우를 통합하고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우를 섞으면 보수 정권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나.
“대한민국 정체성과 법 질서 유지, 자유시장경제 같은 중심적 가치는 지켜 가면서 다소 좌쪽의 정책이라 할지라도 서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현실성 있는 정책이라면 채택하겠다는 게 대통령의 뜻이다.”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대통령께서 서울시장 때부터 갖고 계시던 일관된 철학이다. 대통령 고유 브랜드다.”

“갈라치기 아닌 아우르기 전략”
이 대통령의 이 같은 중도 강화 선언과 이후 보이고 있는 일련의 서민 행보를 놓고 정치권에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무색 투명한 중도는 말장난”(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것”(김대중 전 대통령) 등 진보·보수 양측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쏟아 냈다.

그렇다면 왜 이 시점에서 이 대통령은 중도와 서민을 화두로 꺼냈을까. 이른바 프레임(틀) 선점 차원에서 보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007년 대선 때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 정동영 후보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찾았다. DJ는 이런 충고를 했다. “1984년 미국 대선을 봐라. 매일 화려한 정책을 발표한 먼데일이 감세와 기업활동 자유만 되풀이했던 레이건에게 대패했다. 국민의 마음속에 있는 바람을 빠르게 읽고 무대에 올라가 ‘이것이다’라고 포즈를 취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당시 대선은 DJ의 훈수와는 다르게 흘러갔다. 한나라당은 경제 살리기라는 국민적 바람을 읽고 ‘잃어버린 10년’ ‘경제 대통령’이라는 프레임을 선점했지만 대통합민주신당은 한나라당의 프레임을 그대로 사용해 ‘MB는 경제 대통령이 아니다’는 식의 네거티브 전략을 쓰면서 힘 한 번 못 쓰고 무너졌다. 이른바 프레임 전쟁에서 진 것이다.

캘리포니아대 언어학과 교수인 조지 레이코프는 미디어가 제공하는 헤드라인의 틀 안에서만 문제가 인식되고 논의되는 현상에 주목해 ‘프레임’이라는 인지구조적 용어를 제시했다. 지난 10년간 미국에서 민주당과 진보 세력이 담론을 주도하지 못한 이유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틀로 세상을 보지 못하고 공화당과 보수 세력이 만든 프레임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게 골자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정권 초기부터 ‘강부자 내각’ ‘부자 정권’이란 선동적 구호가 대중의 뇌리에 깊이 자리 잡은 상황에서 아무리 쇄신 인사를 하고 녹색성장 같은 내실 있는 정책을 내놔도 왜곡되거나 공허한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민 출신으로 자수성가한 이 대통령이 ‘서민’이란 컨셉트를 지속적으로 강조하면 비록 ‘MB는 서민이 아니다’는 식의 논쟁이 벌어져도 결코 손해 보는 게임은 아니라는 논리다. 현 여권을 부자와 기득권 세력으로 공격하는 진보 진영의 2대 8 편 가르기 구도를 효과적으로 깨는 측면도 있다는 얘기다. 내년 지방선거 승패의 열쇠를 쥔 30∼40대 샐러리맨과 자영업자들의 표심 공략 카드로도 물론 유용하다.

중도실용 강화론을 미국 클린턴 정부 때 정치 참모인 딕 모리스의 ‘삼각화 전략’으로 설명하는 청와대 박형준 홍보기획관의 주장은 이렇다.

-중도강화론은 부자 정권 프레임을 깨기 위한 것인가.
“부자 정권이란 말이 잘못된 낙인찍기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바로잡는다는 의미가 있는 게 사실이다. 선거든 국가 경영이든 정치사회적으로 ‘아우르기’로 가는 방법이 있고 ‘갈라치기’로 가는 방법이 있다. 응집력을 강화하려면 갈라치기로 가고, 폭넓고 원만한 국정 운영으로 중도층을 끌어들이기 위해선 아우르기로 가는 것이다. 삼각화는 아우르기다.”

-지난해부터 진작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부분이 아쉽긴 하다. 하지만 지난해엔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국정을 다룰 상황이 아니었다.”

‘우유부단’ ‘불도저’ 여론도 의식
“경제나 외교 쪽은 성과가 가시화하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본다. 이제는 정치 쪽에 고민하는 양을 더 투입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지난달 25일 청와대 관계자)

우파로부터는 ‘우유부단하다’, 좌파로부터는 ‘불도저’라는 상반된 비판을 받는 이 대통령의 최근 모습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 여론들을 다분히 수용하는 모양새다.

지난달 29일 라디오 주례연설을 통해 이뤄진 대운하 포기 선언은 정권 출범 후 계속돼 온 오랜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달 26일 정책 자문 교수단을 초청해 세 시간 가까이 난상토론을 벌인 것은 일방통행식 국정 운영 스타일을 바꾸라는 각계의 요구를 수용하는 제스처로 볼 수 있다. 수석비서관들과의 회의와 보고를 ‘만기친람(모든 정사를 혼자 살핌)’식에서 ‘선택과 집중’식으로 바꾼 것은 “과장처럼 일한다”는 비판을 의식한 듯하다.

문제는 ‘강부자·고소영 정부’라는 비판의 시발이 됐고 가장 나쁜 점수를 받고 있는 인사를 국민 눈높이에 맞출 수 있느냐다. 한나라당 쇄신특위는 3일 ‘국정 운영과 당 쇄신 방안’을 발표하며 내각과 청와대 개편, 조기 전당대회를 통한 새 지도부 구성을 건의했다. 하지만 인사에 소극적인 이 대통령의 태도가 얼마나 바뀔지 여전히 불투명하다. 대통령실장·민정수석·인사비서관 같은 주요 인사 라인을 대구·경북(TK) 출신이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특정 지역 편중 인사 논란은 끊이지 않고 있다.

변화의 조짐은 있다. 예상을 깬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와 백용호 국세청장 후보자 인사는 MB식 파격 인사의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공석인 두 권력기관의 수장을 임명하면서 ‘서열 파괴’ ‘외부 수혈’ ‘충청권 우대’라는 키워드를 내세운 깜짝 인사를 함으로써 인적 쇄신의 요구를 상당 부분 잠재우는 효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지난달 23일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밝힌 각 부처 인사 이양 방침은 향후 공기업 인사의 변화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그동안 장관이 임명권자인 공공기관장과 감사는 청와대와 인사 협의를 하는 게 관례였지만 앞으로는 대통령 임명직 외에는 협의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공공기관 297곳의 기관장과 감사 중 장관 임명직은 256개이고 대통령 임명직은 108개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멀리 갈 것도 없이 노무현 정권에서도 공공기관장과 감사는 물론 비상임 이사 선임까지 일일이 청와대에 보고하고 이 과정에서 사람이 바뀌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며 “이번 인사권 이양 조치는 청와대 권력의 한 축을 내주는 파격적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청와대는 조만간 비서관과 행정관 인사 과정에서 서울시 출신, 지난 대선에서 이 대통령의 외곽 단체였던 ‘선진국민연대’ 출신, 이상득 의원 측근 인사를 상당수 퇴진시키는 인사를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식 정치’ 인사로 선봬
이 대통령의 서민 행보와 반전의 정치가 깜짝 효과에 그치지 않으려면 국민의 피부에 직접 와 닿는 정책 개발이 필수적이다.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부터 주택과 교통 문제 등에서 효율보다 분배와 형평을 중시하는 진보적인 생각을 드러냈다는 점을 들어 교육 문제 등에서 획기적인 중산층 드라이브를 걸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다.

이와 관련, 곽승준 미래기획위원장은 2007년 대선 당시 내걸었던 MB노믹스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서민 대책의 핵심인 사교육비 절감 방안을 놓고 최근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MB노믹스의 핵심이 뭔가.
“따뜻한 시장경제다. 부자들이 돈 많이 버는 거 발목 잡지도 않지만 도와주지도 않는다. 그 대신 경쟁에서 탈락하는 사람들, 영세 자영업자, 서민들이 회생할 수 있게 적극 돕는 게 핵심이다.”

-MB노믹스가 왜 잘 안 되나.
“종부세 완화나 부동산 규제 완화 같은 것도 좀 단계적으로, 전략적으로 했으면 좋았다. 학원 심야 교습 단속은 대다수 중산층이 찬성하는 사안이다. 꼭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서민용 정책은 거창한 명분에 비해 실효성에 대한 의문은 물론 수립·집행 과정에서 온갖 논란에 휘말리기 일쑤다. 저소득층에 소비 쿠폰을 나눠 주는 희망근로사업이 실무 준비 부족으로 혼선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게 한 예다. 기획재정부가 1일 하반기 서민 대책이라며 급히 내놓은 마이크로크레디트(소액신용사업) 확대에 대해서는 “재탕·삼탕 대책”이란 비아냥이 나온다. 내년 재정 여건이 좋지 않은 점도 악재다.

탈규제 완화, 친기업의 우파 논리와 서민 보호라는 평등 가치는 태생적으로 양립보다는 부딪힐 가능성이 크다. 서민 위주의 정책이 자칫 보수 우파 정권의 정체성마저 모호하게 할 수 있는 이유다. ‘8·15 생계형 사면’처럼 효과가 빠르고 확실한 카드는 자주 쓰기 어렵다.

서민의 뿌리를 찾아나선 이 대통령의 ‘중도’ 변신은 결국 앞으로 나올 정책의 결과와 국민에게 비치는 이미지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MB 중도강화론의 이론적 배경을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온정적 보수주의’로 풀고 있는 최측근 참모 이동관 대변인은 자신감을 보였다.

“외교 활동 때 대통령은 최고경영자(CEO) 출신다운 세련된 모습을 보인다. 일본말로 하면 아카누케(垢<629C>け)라고 할까. 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정말 뼛속 깊이 서민이다.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도대체 대통령 왜 하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지방 출장 가서 관광을 한 번 하나, 현지 특산물을 한 번 찾아가 보나. 예전엔 해사 졸업식을 벚꽃 축제에 맞춰 했다는데 이제 그런 거 없다. 졸업식 끝나면 바로 올라와 일한다. 은박지 한 장을 젓가락으로 찌르면 쭉 찢어진다. 하지만 은박지 몇 장을 겹겹이 깔아 놓으면 총알도 못 뚫는다. 그렇게 기초를 닦는 일을 이 대통령은 해 왔다. 개혁은 물이 스며들 듯 해야 한다는 게 대통령의 생각이다. 본인도 모르게 하나하나 바뀌어 어느 날 갑자가 ‘아, 바뀌었구나’라고 느끼는 것. 그런 이명박식 개혁이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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