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중소기업 비정규직은 이중 고통에 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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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지금 대한민국은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야만적인 생체실험을 하고 있다. 민주당과 민주노총·한국노총은 “일단 제정된 비정규직보호법이니 실행해야 한다”고 막무가내로 버티고 있다. 이로 인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여의도만 벗어나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대부분의 회사가 2년 이상된 비정규직에게 가차없이 해고 통지서를 보내고 있다. 살풍경스럽기는 도심 사무실들도 마찬가지다. 전산처리 보조와 같은 단순 노무가 대부분인 비정규직을 칼같이 내보내고 있다. ‘비정규직보호법’에 따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정규직 살육의 현장이다.

KBS·대형병원·농협 같은 곳의 비정규직들은 형편이 나은 편이다. 그나마 집회나 시위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노조가 중간에 나서서 도와주는 경우도 적지 않다. 반면 전체 비정규직의 70%가 몰려 있는 30인 미만 영세 기업들은 절망적이다. 중소기업 비정규직들은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정규직 전환은 엄두조차 못 낸 채 변변찮은 일자리나마 2년이란 시한에 걸려 대책 없이 밀려나고 있다. 소리 없는 대량 해고가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원래 비정규직법은 정치권과 노동단체 간 흥정의 산물이다. 당사자인 비정규직은 처음부터 소외돼 있었다. 가난하고 불쌍한 비정규직을 보호한답시고 만든 법률이 흉기로 둔갑해 목을 베고 있는 것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모두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는 옛말이 딱 맞아떨어진다.

해고될 비정규직 규모를 놓고 입씨름을 벌이는 것은 한가하기 그지 없다. 밀려나는 개인에겐 밥그릇이 걸린 문제다. 쫓겨난 자리는 다른 비정규직이 채울 것이라는 ‘고용 총량 불변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이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은 쓸데없이 홍역을 치르고 있다. 쫓겨난 비정규직들은 지금 다른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다. 기업들도 대체 인력을 구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2년 정도 숙련된 비정규직이 나가면 당연히 생산 효율은 떨어지고 나라 경제에도 부담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비정규직을 진심으로 보호하고 싶다면, 이미 답은 나와 있다. 비정규직 문제의 본질은 정규직에 대한 과보호에서 파생된 것이다. 따라서 정규직의 과보호를 벗겨내야 비정규직 문제가 풀린다. 눈앞에 벌어지는 대살육을 멈추려면 일단 비정규직법 유예가 현실적 방법이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의 통 큰 결단 없이는 근본적인 해결을 기대할 수 없다. 민주당과 노동단체들은 ①정부의 지원→②기업의 정규직화→③정규직 노조의 일부 양보가 해결책인 양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순서가 틀렸다. ①정규직 노조의 과감한 양보→②기업 내부의 여유 재원으로 정규직화→③정부 지원의 순서로 진행되면 저절로 문제가 풀린다. 지금 이중의 고통을 받고 있는 중소기업 비정규직의 눈물을 기억해야 한다. 편법과 미봉책으론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