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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 김상사 돌아온 지 36년 고엽제 상처는 아직도 남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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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아, 잘있어라 부산항구야. 미스김도 잘있고요 미스리도 안녕히.” 백야성의 노래가 울려퍼지면 군인들은 함상에서 따라 부르면서 목이 멨다. 그 무렵 “부우우웅” 뱃고동이 운다.

전투부대의 베트남 파병이 결정된 것은 1965년 7월 2일이었다. 10월에 해병 청룡과 맹호부대가 참전했다. “돈 많이 벌어와서 대학 갈 겁니다. 돌아오면 예쁜 색시랑 결혼할 거예요.” 가족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그들은 떠났다.

66년 6월 26일자 한 신문은 베트남 패션을 소개한다. 뒷머리를 상고머리로 치켜 깎는 ‘베트콩 커트’. 통바지에 밑이 넓어지는 ‘아오자이 슬랙스’, 발등만 걸고 굽이 높은 ‘꼬 샌들’이 여름철 한국의 여심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한다. 아오자이는 그곳 여성들이 입는 옷이고, ‘꼬’는 베트남어로 아가씨란 뜻이다.

68년 7월 10일 베트남에서 작전 중이던 강진성이란 일병은 호랑이를 잡아 용맹을 떨치기도 했다(한국정부기록사진집 제7권). 그해 부산에는 월남김치라는 게 등장했다. 파월장병들은 초기에 미군용 통조림을 먹었는데, 음식이 맞지 않아 괴로워했다. 김치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져 국산 김치통조림이 공급된다. 통조림용 김치에서 썰어낸 배추꼭지를 모은 것을 월남김치라고 불렀다. 같은 우리 김치인데도 월남김치 찌개는 더 맛있었다.

69년 춘천여고 응원단장 출신의 여대생 한 명이 신중현의 녹음실을 찾는다. 신씨는 그에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라는 데뷔곡을 준다. 김추자의 섹시한 율동 속에서 터져나온 신바람나는 김상사 스토리는 베트남 참전에 바친 최고의 헌사였다. 71년 동명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신영균이 ‘맹호부대 김상사’를 맡았다.

73년 3월 20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선 파월장병 개선 환영식이 있었고, 대문에 ‘월남 출정 용사의 집’이라는 문패가 붙은 집들이 생겨났다.

2009년 7월 월간중앙은 ‘철군 36년…고엽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전쟁 당시 게릴라가 숨은 삼림지역의 나뭇잎을 없애기 위해 미군기는 저공비행을 하며 ‘에이전트 오렌지’라는 제초제를 살포한다. 장병들은 적의 은폐물이 사라지는 게 좋아서 환호성을 질렀다. 이 땅에서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 이는 12만 명이다. 93년 그들을 진료하기 위한 법률이 만들어졌으나 혜택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고엽제전우회 이형규 총회장은 “나라 위해 싸운 월남 김상사를 나라가 버리는가”라고 물었다.

이상국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