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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동 못하는 노인에 보행기 ‘엉뚱한 서비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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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에 사는 정모(79)씨는 7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왼쪽 팔다리가 마비돼 혼자 힘으로는 잘 걷지 못한다. 정씨는 5월 중순 장기요양보험 서비스를 신청해 2등급(혼자 움직이지 못해 일상생활에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 판정을 받았다. 당시 건강보험공단 직원이 집을 방문해 신체 기능, 기억력, 혼자 외출할 수 있는지 등을 파악했다. 2주일 후 정씨는 서비스 이용계획서를 우편으로 받았다. 거기에는 ‘주 1회 방문 목욕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적시돼 있었다. 다른 서비스는 없었다.

정씨는 주 2회 신장투석을 받으러 병원에 가야 하는데 혼자 가기가 힘들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인근 관악산에 재활을 위해 운동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용계획서에는 외출 보조 서비스가 없었다. 건보공단이 방문 조사 때 정씨 부인이 말하는 대로만 계획서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정씨의 신체 상태를 종합적으로 판단해 서비스 계획을 작성한 게 아니었다.

‘효자 보험’으로 불리는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다. 가족이 떠맡고 있던 치매·중풍 노인 수발 부담을 요양보험이 담당하면서 가족 부담이 크게 줄었다. 가족과 수혜자들의 만족도가 87~91%에 달할 정도로 높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갖가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정씨 사례처럼 서비스의 질 관리가 제대로 안 된다. 제대로 되려면 환자한테 어떤 서비스가 필요한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건보공단 직원이 한 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서비스 대상자의 신체 기능, 인지 능력 등 52가지를 평가했다. 시간이 짧다 보니 대상자의 말에 의존해 필요한 서비스를 정한다. 하지만 대상자들이 치매·중풍 환자들이라 의사 표현이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치매 환자 황덕순(77·여)씨의 며느리 정명희(39)씨는 “건강보험공단 직원이 나와서 ‘손 들어 보세요’ ‘일어나 보세요’ 등을 시키더니 서비스 이용 등급을 매겼다. 모든 항목을 체크하지 않았는데도 어머니가 성질 내니까 중단하고 돌아가더니 2등급 판정을 했다”고 말했다. 건보공단 요양급여실의 정일만 부장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노인이 예상보다 많아 직원 1명이 노인 140명을 담당하고 있다”며 “개인별 관리를 못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민간 업체가 입맛대로 서비스를 결정할 때도 있다. 암 수술을 받고 요양보험 서비스를 받고 있는 박모(68·서울 동작구)씨는 서비스 제공업체에 목욕 서비스를 신청했지만 업체가 요양 서비스(청소 등 일상생활 도움)를 강권해 이를 포기했다. 업체가 전문성이 필요 없고 비용이 적게 드는 요양 서비스를 권한 것이다.

누워서 생활해야 하는 1등급 환자들은 욕창 관리가 필수적이다. 그런데도 서비스는 반대로 간다. 지난해 8월에는 간호 서비스 이용자가 1급 대상자의 19%였으나 올 2월에는 7%로 줄었다. 반면 같은 기간 요양 서비스는 35%에서 41%로 늘었다.

건강보험공단은 최근 요양보험 보고서에서 “▶누워만 있는 환자한테 보행기를 지급하거나 ▶걸어 다니는 환자에게 욕창 방지 매트를 지급하는 등 용도에 맞지 않게 운영된 사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서비스 제공업체의 난립도 문제다. 서울재가노인복지협회 김현훈 회장은 “서울 은평구만 해도 대상자는 500여 명인데 50여 곳이 경쟁을 하다 보니 서비스 질이 떨어진다”며 “공짜로 서비스를 제공하거나 아파트 부녀회에 냉장고를 사주고 노인을 끌어오는 식의 편법 행위가 성행한다”고 말했다. 고신대 배성권(의료경영학) 교수는 “정부가 민간에 서비스를 맡기면서 공공성을 요구하니 문제가 생긴다”며 “일본처럼 일정 규모나 질에 못 미치는 업체는 퇴출시키는 등의 기준을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건복지가족부 요양보험제도과 박정배 과장은 “서비스 이용계획서가 실효성을 발휘하도록 등급 판정과 서비스 설계에 전문성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은하·허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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