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재미교포 예술가 차학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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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오늘 저녁 식사 때 쉼표 (머릿속에 부호 < ,> 를 그리며 읽을 것 - 편집자)가족들은 물을 것이다 쉼표 따옴표 열고 첫날이 어땠지 물음표 따옴표 닫을 것 …따옴표 열고 한 가지 밖에 없어요 마침표 어떤 사람이 있어요 마침표 멀리서 온 마침표 따옴표 닫고…" 차학경의 실험소설의 한 대목이다.

차학경? 시인 이상 (李箱) 이후 '전위적인 것' 에 대해 인색했던 풍토탓일까. 혹은 82년 뉴욕에서 우연히 강간살해당한 그의 서른 한 살 생이 너무 짧았던 탓일까. 재미교포 예술가 차학경, 미국명 '테레사 학경 차' 는 미국 전위문화계에 남긴 족적에 비해 한국에서는 아직도 낯선 이름이다.

부산출신으로 11세때 미국으로 이주, 버클리에서 문학과 미술을, 파리에서 영화를 공부한 그녀는 뉴욕에서의 짧은 활동 동안 문학.비평.영화.비디오설치를 아우르는 다방면의 활동을 통해 실험적 예술작품을 남긴 인물. '포스트 모더니즘과 같은 새로운 비평틀에 의해 비로소 평가가 가능해진 인물' 이란 평과 함께 사후 휘트니 미술관에서 그의 비디오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던 이 낯선 예술가를 국내에서도 만날 기회가 하나둘 이어지고 있다.

토마토출판사가 대표적 저서 '딕테 (DICTEE)' 를 지난해 11월 번역출판한 데 이어 극단 뮈토스가 이를 연극으로 형상화, 문예회관대극장에서 19~30일 공연중인 것. '딕테' 란 제목은 받아쓰기.명령.지시 등 '말하다' 의 의미를 띠는 불어 단어. 칼리오페.멜포메네 등 여신의 이름이 붙은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기승전결의 줄거리 대신 영어.불어.한국어 등 언어를 의미인 동시에 기호로 해체하는 시적인 산문들로 구성돼 있다.

연극 '딕테' 는 작품의 발췌문을 고스란히 대사로 옮겨, 작가 자신을 구체화시킨 '말하는 여자' 와 4명의 코러스들이 읊조리는 동시에 슬라이드와 음향효과를 통해 시청각적 무대를 꾸민다.

갈피 갈피에는 일제침략.전쟁.하와이 이민.우물가의 어머니.잔다르크와 유관순 등에 대한 언급이 눈에 띈다.

읽는 언어.보는 언어.듣는 언어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가 표현하려던 바가 소수민족이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임을 짐작하게 하는 장면이다.

'딕테' 의 또 한 대목. "…그녀가 티켓을 사는 동안 카메라는 왼쪽에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전신을 미디엄 클로즈업 숏으로 잡는다.

카메라는 10분의 1초간 멈춘다.

이제 카메라는 그녀 뒤에 있고, 그녀는 줄 맨끝에 서있다.

롱 숏. 그녀 뒤의 미디엄 클로즈업 숏으로 이어진다.

그녀는 머리를 날카롭게 왼쪽으로 돌린다. 컷. …"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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