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산하 북녘풍수]18.평양의 풍수 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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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임진왜란 당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 와 명나라 심유경 (沈惟敬) 이 강화를 위한 담판을 벌이기도 했던 연광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실 풍수 비보 (裨補)에 있다.

물론 현장 안내판 어디에도 풍수에 관한 얘기는 눈에 띄지 않는다. 안내를 맡았던 리정남 선생도 그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라 한다.

아마도 풍수를 '봉건도배' 들의 무덤자리 잡기 욕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그들의 역사관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금수산 최고봉인 최승대나 을밀대에서 평양시내를 조감하면 대동강과 보통강에 둘러싸인 평양시의 지모 (地貌)가 마치 '배 떠나가는 형국 (行舟形)' 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이미 '택리지' 에도 지적돼 있는 얘기인 만큼 꽤 오래 전부터 알려져 온 평양의 풍수 형국론일 것이다.

술법상으로 행주형에 해당하는 고을이나 마을은 그 배를 묶어놓을 닻이 필요하다고들 한다. 평양도 같은 경우로 그 닻을 연광정 밑덕바위 아래 강물 속에 넣어두었다는 것이 풍수 비보설의 골자다.

1923년 실제로 연광정 밑에서 이 닻을 건져올린 사실이 있다. 리선생은 그 일 역시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 라며 흘려버린다.

당시 일본인은 풍수를 조선의 대표적인 미신으로 꼽았던 만큼 이 닻은 다시 내려지지 않고 주변에 방치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바로 그해 평양에는 대홍수가 나 평양 시가지 전체가 침수되는 천재 (天災) 를 만나게 된다.

그 이유를 닻을 올려버린 탓이라 여긴 주민들이 원래의 장소에 다시 내려놓음으로써 평양의 진호 (鎭護) 를 삼았다고 한다.

'택리지' 에는 "우물을 파면 읍내에 화재가 많이 나기 때문에 메워버렸다" 고 돼있는데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평양 행주형의 풍수설화는 단순한 미신에 불과한 것일까? 일본인뿐 아니라 서구인들 역시 그런 식의 풍수를 미신으로 취급하는데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일은 아닌 것같다. 우리 조상들이 모두 바보란 말인가? 뭔가 이유가 있기에 행주형이란 형국 이름을 붙이고 그에 따른 대비를 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그 문제를 따져보자. 평양은 대동강이 거의 1백80도로 방향을 바꾸며 만곡하는 물길의 공격사면 쪽에서부터 도시가 시작된다.

다행히 그것을 능라도와 금수산 줄기가 가로막음으로써 완화시켜 주기는 하지만 일단 큰 물이 급격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경우에는 역부족이다.

뿐만이 아니다. 보통강 또한 금수산의 옆구리를 치며 만수대 쪽을 공격하는 형세이기 때문에 홍수가 났을 때 두 물의 협공을 받으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지세가 된다.

게다가 시내 남쪽은 창광산과 해방산이 가로지르고 있어 시내로 들어온 물의 배수 (排水) 까지 막고 있는 형편이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행주형 풍수설화며 사람들은 이 설화를 통해 평양의 수재 (水災) 를 항상 심리적으로 대비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전에 유홍준 교수로부터 "평양에 우물을 파지 못하도록 나라에서 금령을 내린 것은 행주형 풍수설화와 관련해 지반이 침하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그보다 대동강과 보통강의 퇴적층 때문에 생길지도 모르는 물의 장기 (장氣 : 풍토병의 원인이 되는 기운) 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을 것" 이란 식으로 답변했었다.

결론적으로 그것은 틀린 말이었다. 하기야 프랑스 신부 달레 (Charles Dallet) 조차 그의 저서 '조선교회사 (朝鮮敎會史)' 에서 조선의 풍토를 언급하면서 "어느 곳이나 물은 맛이 없고 많은 지방에서 여러가지 병의 원인이 되고 있다" 고 했을 정도니 내가 평양에 장기가 있을 것이라는 혐의를 갖게 된 것도 크게 망발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직접 와서 보니 평양 중심부는 퇴적지형이 아니었다. 물에 장기의 위험성이 있는 곳은 평양시내 남부의 극히 일부, 그러니까 지금의 평양시 평천구역과 쑥섬.두루섬 일대 정도였다.

그러니 풍수의 금언대로 "보지 않은 것은 말하지 말아야" 하고 "물을 건너고 산을 넘는 수고 (登涉之勞) 를 마다해서는 안되는 것" 이다.

반드시 현장을 본 후에야 확언할 수 있는 것이 지리학임을 이번 기회에 다시 절감한 셈이다.

어찌됐든 옛 사람들이 연광정 밑 대동강물 속에 쇳덩이를 담가둔 것은 홍수피해에 대한 상징적 대비의식에서였을 뿐 먹는 물 (食水) 과는 관계가 없었다. 홍수때 밀어닥친 공격사면에 대한 대비는 연광정의 쇠닻뿐이 아니었다.

대동강 공격사면의 핵심에 해당하는 강변에는 영명사 (永明寺) 를 세워 실질적인 홍수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

'평양영명사비문 (平壤永明寺碑文)' 에는 "절이 피폐해지면 중이 흩어질 것이요, 중이 흩어지면 평양의 북성 (北城) 이 허 (虛) 해질 것이다.

만약 일조위급시에 북성을 못지킨다면 평양 또한 안전치 못할 것" 이라고 기록돼 있다. 영명사가 평양 북쪽의 허결처 (虛缺處) 를 비보하기 위한 비보사찰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절에는 승려들이 상주한다. 평상시 그들은 대동강물의 형세를 관찰하고 위험여부를 판단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일단 유사시 홍수가 지면 그들은 급거 투입할 수 있는 현장노동력의 기능을 갖는다. 얼마나 지혜로운 홍수방어 대책인가.

무엇이 미신이란 말인가. 이건 오히려 땅에 대한 선조들의 지혜가 집적된 내세울 만한 우리식 지리학 아닌가.

지금 영명사는 흔적도 없다.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그리 된 것이라 하는데 그 아래쪽에 있는 부벽루만이 옛날 영명사의 위치를 짐작케 해줄 뿐이다.

부벽루의 본래 이름이 영명루였다는 점을 상기할 일이다.

부벽루는 모란봉 동쪽 청류벽 위에 있는데 뛰어난 경치 때문에 진주 촉석루.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 3대 누정의 하나로 꼽힌다.

고구려 광개토대왕 3년 (393) 영명사의 부속건물로 세웠졌다가 12세기에 부벽루로 개명된 것인데 주춧돌과 돌계단의 일부는 고구려때 것이고 지금의 건물은 광해군 6년 (1641)에 다시 세운 것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이런 절까지도 그 조짐을 드러내는 것일까? 고려 충선왕때 문신 이혼 (李混) 이 지은 시구는 고려가 이미 낙일 (落日)에 들어섰음을 잘 나타내 준다.

"영명사 안에 중은 안 보이고 앞에 강만 홀로 흐르누나/외로운 탑이 뜰가에 서 있고 사람 없는 나루터에 작은 배가 비끼었네/장천 (長天)에 나는 새는 어디로 가려는고. 넓은 벌에 동풍은 쉴새없이 부는구나/ 아득한 지난 일을 물을 이 없으니 엷은 연기 비낀 석양에 시름겨워 지옵네. " 이 순간 나 또한 이혼의 감회를 닮아 시름겹다.

글 = 최창조

※다음 회는 '인민대학습당과 주체탑' 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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