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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중국 산책] 한중일, 중일한, 그리고 일중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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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는 흔히 '총성 없는 전쟁'으로 불립니다.
총과 대포만 직접 쏘지 않을 뿐
국익을 위해선 사생결단을 하고 싸운다는 뜻이겠지요.

지난 24일 대한민국 국회에선
한반도를 둘러싼 4강 간에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졌던 모양입니다.

한나라당 구상천 의원이 주최한
'북핵 문제 전망과 해법' 토론회에서
4개국 대사들 간에 아주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 것이지요.

까다로운 북핵 문제를 어떻게 풀까의 내용보다
누가 먼저 발언하느냐의 '의전'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결국엔 각 대사관 관계자들이 '룰 미팅'을 열어
아그레망(주재국 임명 동의)을 접수한 순서대로 발언했다고 하네요.
룰 미팅까지 가져야 했을 정도로 대사들이 발언 순서에 신경을 쓴 건
발언 순서가 자국의 위상과 관련이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튼 한국에 부임한 순서대로 발언하기로
4강 대사관 간에 합의가 이뤄졌지만,
이를 보도하는 한국 언론들은 어떻게 순서를 매김했을까요.

한국 언론이 이를 보도하면서
4강의 순서를 어떻게 위치시키는가는
그 나라에 대해 한국이 느끼는 중요성, 호감도 등이 배어나니까요.

세간에 중조동으로 알려진 3개 신문의
4강 언급 순서, 또는 4강 대사의 사진 배열 정도 등을 보니
모두 미국은 첫 번째, 러시아는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2위 자리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다툼입니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미중일러로,
조선일보는 미일중러 순으로 4강을 언급했습니다.
사실 오랜 세월 일본이 미국의 다음 자리를 차지했 점을 볼 때
일본으로선 내심 불편한 위치 변화일 것입니다.

지난 몇 년 사이 중국의 세계적인 부상이 두드러지면서
최근엔 중국이 일본에 앞서 호칭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지요.
최근 주한 중국대사관 관계자들을 만나면서
어떤 자리에서건 중국이 일본보다 앞서야 한다는데
이들이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이제 일본을 제치게 된 기세를 몰아
미국보다도 앞서야 한다며 세몰이에 나설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이 미국보다 앞서 호칭되는 날은 언제일까요.
그때쯤되면 세상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 있을 것 같네요.

한편 한중일 3개국 회의 때 각국은 3자를 어떻게 호칭할까요.
한국에선 '한중일'이 대세입니다.
일본에서는 '일중한'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보통 '중일한'이라고 하지요.
중국과 일본은 한국을 맨 뒤로 돌리고 있지요.

일본에서 '일한중', 중국에서 '중한일'이라고 할 날이 올까요.
땅덩어리 작다고 그런 날 없을 것이라곤 말할 수 없겠지요.
누구에게도 존경 받는 '강한 대한민국'이 만들어진다면
'일한중'과 '중한일'이 꼭 꿈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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