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칼럼]천국의 마룻바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천국의 마룻바닥은 얇은 베니어 한장으로 돼 있고 그 아래층은 바로 지옥이라고 한다.

그래서 천국은 지옥의 가장 위험스런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프랑스 월드컵대회 멕시코와의 경기에서 하석주가 찬 그 절묘한 프리킥의 골인도 그랬다.

그로부터 2분 후에 바로 그 하석주는 용력 넘치는 단 한번의 백 태클 때문에 퇴장당하고 만다. 한국팀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지극한 환희에 넘치던 그러나 너무도 짧았던 한국 축구의 천국은 그것으로 자체의 깨진 마룻바닥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는 말 뒤에 '사람은 상징 (象徵) 으로 산다' 는 말이 붙어서 따르기도 한다.

배가 부른 사람이 금강산 구경을 나서는 경우가 보통이지만 반대로 요새처럼 점점 위기에 빠져들고 있는 경제의 배고픔 때문에 월드컵의 승리 구경에 매달리는 경우도 있다.

이 때의 상징이란 한마디로 '의미' 다.

사람에게는 좋을 때나 궂을 때나 사는 '의미' 즉 문화가 필요하다.

사는 의미가 열리면 삶도 열리고 사는 의미가 닫히면 삶도 닫힌다.

생각하면 1인당 소득 1만달러 경제도 너무나 짧았던 천국이었다.

지금은 짐작컨대 우리는 1인당 5천달러대로 추락한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60년대 이후 거의 40년동안 한국사람 대부분에게 경제 자체가 삶과 삶의 의미를 겸임 (兼任) 해 왔다.

재물을 삶의 의미로 삼으면 그 상스러움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역시 그 위험함 때문에 걱정해야 하리라. 재물은 천국의 연약한 마룻바닥이 견디기엔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불운 (不運) 은 한탄하기보다 분석할 필요가 있다.

행운 자체가 불운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일 때는 특히 그렇다.

불운이 더 심한 불운의 원인이 돼 확대 악순환을 만들고 있다고 판단될 때도 특히 그렇다.

골을 넣은 것이 과도한 태클을 감행하게 하는 원인이 된 것은 아닌지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경제기적 자체가 오늘날 몰락의 원인이 아니었던가도 심각하게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행운 자체가 곧 다음 불운의 원인이 되는 그런 사람.팀.국민의 행운은 아예부터 없었던 것만도 같지 못하다.

이번 축구의 불운은 대통령을 비롯한 정관 (政官).기업.노조 지도자들에게 이 점을 명심시키려는 하늘의 뜻이었을 수도 있다고 본다.

무게가 전혀 없는 것, 불굴의 영혼, 음악, 진정한 무형의 문화재, 프로테스탄트 윤리, 꽃을 노래하거나 참선 화두로 선택된 단어, 이런 순수한 소프트웨어로 이루어진 의미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천국의 얇은 마룻바닥도 '의미' 를 지탱할 만큼은 튼튼하다.

예수는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 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했지만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의미 체계가 부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부 (富)' 가 곧 사는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천국적인 삶의 의미를 따라, 또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에 따라 살다 보니 부자가 돼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오래 견딜 수 없다는 것이 이 땅위의 경험적 현실이다.

축구의 승리는 경제 파탄의 실의에 찬 국민을 사는 의미에 연결시켜 주는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굴의 스포츠 정신 그것을 삶의 의미로 받들어 간직하지 않는 선수나 팀의 행운은 잠시로 끝날 수밖에 없다.

스포츠 정신은 다른 고귀한 정신과 마찬가지로 자체의 질량 (質量) 을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한없이 정밀 (靜謐) 하다.

유교정신, 또는 다른 아시아주의라도 그것이 변장한 관료주의와 물신주의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사람 사는 의미를 고도로 정련 (精鍊) 한 '지선 (至善)' 추구의 상징이라면 경제적 번영을 낳아 오래 유지하는 데에 프로테스탄티즘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할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름만 프로테스탄트 정신이라고 붙이고는 관료주의와 물신주의에 탐닉하고 있다가는 생산성의 하락, 체제의 경직화, 폐쇄주의 회귀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축구나 경제의 승리를 잃기에 앞서 우리가 잃은 것은 우리의 삶에 붙이고 살던 소박하고 성실한 의미체계다.

이웃사람을 사랑하고 지나가는 길손을 푸대접하지 않던 마음씨,가난해도 주눅이 들 줄 모르던 기개, 교만한 자를 가장 업신여기고 잘난 사람보다 된 사람을 더 존경하던 삶의 질서를 잃어버렸다.

성공보다는 끈기를 더 치고 결과보다는 동기를 먼저 살피던 덕성을 잃어버렸다.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 간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삶의 의미에 다시 통하게 되기를 무엇보다 먼저 힘써야 할 것 같다.

강위석 논설고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