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대타협'이 먼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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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예상대로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정계개편이 정치의 최대관심사가 되고 있다.

집권측의 굳은 결심을 보거나 6.4지방선거의 결과를 보거나 정계판도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 같다.

우리의 당면 최대과제가 경제위기 극복인데 정계개편이 어차피 이뤄질 것이라면 가급적 경제위기 극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최소한 지장은 주지 않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텐데 과연 그럴지 그것이 걱정스럽다.

문제는 정계개편을 추진하는 여당이 과연 어떤 정계구도를 그리고 있고 어떤 추진방식으로 나올 것이냐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야당에서 여당으로 가고 싶어하는 사람이 꽤 있다는데 그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정도라면 걱정할 만한 정쟁 (政爭) 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계개편이란 이름으로 정치권에 변절.배신.투항이 판을 치고 여당이 숫자 불리기에 급급해 감투로 유인하고 압력을 넣고 약점을 쑤시는 방식으로 나간다면 안하는 것만 못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

필자는 두달쯤 전에 여당이 야당의원을 영입하더라도 최소한 몇가지 심사기준은 가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여당이 스스로의 자존심과 정체성 (正體性) 을 존중한다면 잠재적 피의자나 부패.비리관련자 따위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지금껏 여당은 한나라당에 대해 이중적 태도를 보여 왔다.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의원을 영입대상으로 지목하고 나아가 한나라당의 특정세력들과 연대가 가능하다는 신호도 보여 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을 '나라 망친 집단' '경제파탄 책임 정당' 이라고 규정해 왔다.

또 누군지 모를 한나라당의원들을 겨냥해 비리관련의혹을 계속 제기해 왔다.

이른바 김선홍 (金善弘) 리스트.이신행 (李信行) 리스트가 있다는 것이고 최근엔 건설업체 청구의 비자금과 관련된 리스트도 있다는 말이 나왔다.

박태준 (朴泰俊) 자민련총재는 TK지역 유세에서 청구리스트와 관련해 "머잖아 여러분이 잘아는 이 부근 사람이 등장할 것" 이라고까지 예고했다.

뿐만 아니라 PCS사업과 종금사 인허가와 관련해서도 야당의원 비리관련설을 흘려 왔다.

만일 이런 여당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여당은 '경제파탄 책임집단' 과 연대할 명분도 없고 비리관련 의혹대상을 영입할 수도 없게 된다.

결국 경제파탄의 책임도 별로 없고 비리관련 약점도 없는 사람을 영입대상으로 한다는 얘긴데 여당은 구체적으로 그런 기준을 밝힐 수 있을 것인가.

이런 기준없이 숫자 불리기로만 나간다면 자칫 자기들이 비난.비판해온 대상자들을 무분별하게 끌어안는 결과가 됨으로써 스스로의 자존심과 정체성이 의심받는 결과가 올지도 모른다.

또 이럭저럭 여당이 과반수의석을 확보했다고 하자. 그렇다고 단독국회를 할 것인가, 국회에서 일방강행을 할 것인가.

지금 과반수를 가진 한나라당이 국회를 마음대로 못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볼 때 의원영입은 말처럼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고 현실적으로 실익 (實益) 도 크지 않다.

자칫 여대 (與大) 를 만들려다 정쟁 유발로 경제위기 극복에 지장을 준다는 비판을 들을 수도 있고, 손쉽게 약점의원 빼가기로 나가면 여당이 문제의원 피난처냐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정계개편의 목적이 결국 정국안정과 위기극복태세의 확립에 있다면 굳이 이런 모험적인 (?) 정계개편보다는 보다 쉬운 (?) 방법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제의를 하고 싶다.

6.4선거 결과를 보면 여 (與) 는 서 (西) 고, 야 (野) 는 동 (東) 이다.

西만으로 나라를 이끌 수 없고 東만의 정치도 있을 수 없다.

하물며 경제위기의 격랑속에 한 배를 타고 있는 西.東이 아닌가.

그렇다면 西.東간에 위기극복의 거국태세확립을 위한 대타협을 하는 것이다.

여야수뇌.영수 등이 만나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갖고 합의의정서를 만들면 어떨까. 그 내용은 대개 다음과 같이 하면 좋을 것 같다.

①국난극복을 위해 여야는 초당적 (超黨的) 으로 협력한다.

②중요정책은 여야가 사전협의하고 국회에서 신속처리한다.

③총리서리는 최대한 빨리 정식 총리로 인준하고, 국회 원 (院) 구성은 의석비율을 존중한다.

④선거기간의 고소.고발은 서로 취하하고 정치문제는 정치권에서 처리한다.

최소한 이런 정도의 타협은 있어야 집권측이 말하는 지역연대나 東西화합의 전 (前) 단계 바탕이라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 국난이라고 한다면 여야 모두 국난에 걸맞은 '그림' 을 그려야 하지 않겠는가.

송진혁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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