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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교·광교, 속 보이는 도시설계로 범죄 막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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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호 08면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은 경기도 일산에서 30여 가지 작물을 키운다. 본래는 농장에 딸린 집에 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사는 곳은 아파트다. 농장으로 출퇴근하는 게 탐탁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 보안 때문이다. 김 전 행장처럼 단독주택이나 전원주택에 살고 싶어도 치안이 미덥지 않아 마음뿐인 사람이 적지 않다. 왜 단독주택은 아파트보다 범죄에 취약할까.

투명 엘리베이터, 밝은 지하주차장, 낮은 담장

‘환경디자인을 통한 범죄예방(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 Design)’, 즉 ‘CPTED(셉테드)’는 우리나라에서 단독ㆍ다세대ㆍ연립주택 지역보다 대단위 아파트 단지나 초고층 주상복합단지가 범죄 발생이 적은 이유를 설명해준다. 단독ㆍ다세대ㆍ연립지역은 대개 골목이 많고 길이 비좁다. 행인과 거주자의 눈길이 닿지 않는 사각 지대가 그만큼 많다. ‘자연적 감시’가 잘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구분도 명확하지 않다(영역성 부족). 주거용도의 주택뿐 아니라 여관ㆍ유흥주점이 섞여 있어 잠재 범죄자나 취객 등 이방인과 동네 이웃이 잘 구분되지 않는다. 가스 배관이 노출되고 조명이 시원치 않다. 지저분한 곳도 많다.

CCTV 설치로 자연감시가 잘 안 되는 곳의 범죄를 예방할 수 있다. 서울 강남구 CCTV 관제센터. 중앙포토

반면 아파트 단지는 경비실이나 출입구 개폐 장치가 설치돼 출입 통제가 엄격히 이뤄진다(접근 통제). 커뮤니티가 형성된 단지에 낯선 사람이 들어서면 이웃 눈에 금방 띈다. 관리소가 있어서 단지를 깔끔하게 관리한다(유지관리). 10~20년 전에 지은 아파트의 경우 CPTED 설계 기법이 도입되지 않았으나 CPTED 요소는 적지 않게 적용된 셈이다. CPTED는 주택과 도시를 설계할 때 범죄를 유발하는 요소를 줄이고, 범죄를 억제하는 요소를 늘리면 범죄 발생률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는 개념을 체계화한 것이다.

지하철 낙서 지우자 범죄 감소
범죄와 환경의 관계는 미국 스탠퍼드 대학 필립 짐바르도 심리학 교수의 1969년 실험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치안이 잘된 곳에 보닛을 연 채 차를 1주일간 방치했다.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다음 실험에서는 자동차의 작은 창문을 깨뜨려 놓았다. 불과 10분도 안 돼 사람들이 배터리를 빼내고 타이어를 가져갔다. 또 빈 아파트 건물에 창문을 하나 깨뜨려 놓았다. 시간이 흐르자 다른 창문들이 깨졌다. 벽은 낙서로 지저분해졌다. 쓰레기가 떨어진 곳에 다른 사람이 쓰레기를 버리고, 한두 명이 다니던 울타리 개구멍이 많은 사람이 드나들면서 점점 커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그 유명한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 나왔다. 작은 무질서나 불균형이 사람들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이다.

범죄를 예방하려면 환경이 황폐화하거나 시설물이 망가지지 않게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CPTED의 출발점도 여기서 나왔다.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은 깨진 유리창 이론을 다듬은 뒤 1984년 뉴욕 시에 지하철의 흉악 범죄를 줄이기 위한 대책으로 낙서를 깔끔히 지우자고 제안했다. 당시 데이비드 건 교통국장은 제안을 받아들여 무려 차량 6000대의 낙서를 지웠다. 사소한 법 위반 행위도 단속했다. 범죄 건수는 낙서를 지운 지 2년 뒤부터 본격적으로 줄어 1994년에는 절반으로 감소했다. CPTED는 관리뿐 아니라 설계 단계부터 적용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CCTV보다 비용 적게 들어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 정부가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건축을 위한 CPTED 가이드라인’을 소개했다. 그러나 이 가이드라인은 한국의 현실과 동떨어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5년 3월 경찰청은 CPTED 명칭을 내걸고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도시 계획ㆍ설계자, 범죄과학자 등이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부천시를 CPTED 시범지구로 지정하고 연구했다. 그러나 부천시와 강남구 등의 사례는 범죄 취약 지구에 CCTV나 가로등을 설치하거나 창문에 경보장치를 설치하는 등 기존 도시에 보안 장비를 덧붙이는 단편적 수준에 그쳤다. 경남발전연구원 정재희 연구위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도시를 만들고 건물을 지을 때 과학적인 방범 시스템을 고려하지 않았다”며 “사후에 CCTV를 설치하고 있으나 대당 1000만원에 이르는 설치 비용이 큰 부담”이라고 말했다. 그는 “최소의 비용으로 범죄 예방을 높이는 CPTED 설계가 하루빨리 적용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CPTED는 최근 뉴타운과 신도시에 종합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용인대 박현호 교수는 “행정도시ㆍ혁신도시를 비롯해 판교ㆍ광교 신도시의 경우 정부가 도시설계 단계에서 CPTED 원리를 적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지자체 중에는 서울시가 가장 앞서가고 있다. 서울시는 6개월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올 3월 150쪽이 넘는‘CPTED 지침’을 만들고, 재정비촉진사업 및 뉴타운사업 240여 개 구역에 적용하기로 했다. 서울시의 CPTED는 크게 ▶자연적 감시를 쉽게 할 수 있도록 건물을 배치하고 ▶출입 통제 장치로 범죄인의 접근을 통제하며 ▶울타리ㆍ표지판ㆍ조경 등을 통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하고 ▶범죄자를 유혹하는 물건을 없애고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는 것이 골자다.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은 범죄예방 도시설계 표준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토해양부ㆍ행정도시건설청ㆍ서울시 등이 경쟁적으로 CPTED를 추진하면서 추진 주체마다 적용기준이 달라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기술표준원에서는 기관별로 서로 다른 CPTED 설계 기준을 통합하고 전국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할 방침이다.

CPTED는 사생활 보호와는 충돌한다. 예컨대 집주인은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속이 안 보이는 울타리를 치고 싶어하고 CPTED 설계는 범죄 예방 차원에서 속이 보이는 낮은 울타리를 권고한다. CPTED에서는 CCTV를 설치하는 것이 좋지만 이로 인한 프라이버시 침해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큰 실정이다. 고려대 이경훈 교수(건축학)는 “안전 가치와 조경이나 프라이버시 존중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 있으므로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생활 보호’와는 충돌
10년 전부터 CPTED를 강력히 추진한 영국이나 미국 플로리다 주의 경우 범죄가 꾸준히 감소했다. 2000년 영국 웨스트요크셔 지역 중 CPTED를 도입한 주택지구는 주거 침입 절도가 그렇지 않은 인근 지역의 50%, 차량범죄는 40%밖에 발생하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99년 비영리법인회사인 ‘범죄예방회사(CPI)’가 설립돼 SBD(Secured By Design) 인증 사업을 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경찰안전주택’이라는 CPTED 인증을 96년부터 시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천 시범지구에서 주거 침입 절도 피해율이 38%, 강도 범죄 피해율이 57% 각각 감소했다. CPTED 요소가 많은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주택 가격 차이는 체계적인 연구가 없어 밝혀진 게 없다.

하지만 안전한 주택과 도시에 수요가 몰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관관계가 클 것으로 보인다. 박현호 교수는 “조경ㆍ조명ㆍ거리조성 등은 어차피 해야 하는 것이므로 CPTED 설계를 적용한다고 해서 꼭 비용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며 “추가 부담이 있더라도 범죄 감소에 따른 사회경제적 비용 절감과 CPTED 적용에 의한 자산가치 상승 같은 반사이익을 감안하면 크게 문제되지 않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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