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선거날 아침의 한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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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선거날 아침인데 투표를 하러 가야 할지, 간다면 누구를 찍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지난 95년 지방선거 통계를 보면 부동층 (浮動層) 이 유권자 절반에 가까운 48%였다.

선거날 아침에서야 찍을 후보를 결심한 사람이 21%, 하루 이틀전에 결심한 사람은 23%였다.

이번 선거에는 이러한 부동층이 훨씬 늘어나 있다.

왜 이럴까. 후보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왔는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방의원의 경우 지난 선거에서는 유권자의 60% 이상이 후보에 대해 전혀 지식이 없었던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번의 경우는 그 수치가 80%에 이른다.

내가 찍어봐야 대세에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정치적 무력감도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선거도 하기 전에 누가 당선될지 뻔한 마당에 구태여 투표장까지 갈 의욕을 느낄 사람이 있겠는가.

정치나 후보에 대한 불신과 실망도 원인이다.

도대체 이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아래서 하루하루 살기도 힘든 마당에 감투나 얻자고 요란을 떨고 다니는 사람들이 밉고 야속하다는 심정이 공통일 것이다.

선거가 우리의 일상생활과는 전혀 연관을 갖지 못한 먼 나라 일로 보이는데 투표에 관심이 생기겠는가.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투표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라는 강박관념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투표가 국민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라는 목소리가 우리를 괴롭힌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의무감에 끌려 투표장에 나가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니 투표장에 가서야 "에라 모르겠다" 는 식으로 한 표를 던지고 나온다.

마치 숙제를 미루다 당일에서야 후다닥 해치우는 학생같은 심정으로 말이다.

이런 식의 선거를 해봐야 누구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선거불감증.부동층이 확산되는 근본원인은 무엇보다 지역주의 때문이다.

특히 지방선거에서의 지역주의는 선거의 의미를 완전히 무색하게 만든다.

선거가 의미를 갖는 것은 선택과 교체라는 장치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정치엘리트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교체할 수 있기 때문에 생명력을 갖는다.

정치엘리트가 전횡을 저지르지 못하고 부패를 자제하며 재임기간

업적을 생각하게 하는 동기는 바로 이런 국민의 선택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같이 어떤 지역에서는 어느 당이 싹쓸이하는 풍토에서는 이러한 선거의 민주적 기능이 정지된다.

심하게 말하면 그 지방의 경우 일당독재 체제나 다름없다.

국민의 선택과 관계없이 당의 결정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니 결국 지방정부는 그 지역당의 종속물로 전락된다.

봉건 영주 (領主) 의 봉토 (封土) 와 같이 지역정당의 봉토가 된다.

시장후보가 되기 위해 그 지역 의원에게 수억원을 건넸다는 폭로나 구청장 후보가 되기 위해 지역 부위원장에게까지도 수천만원을 건넸다가 구속되는 사건 등은 지방선거가 지역정당의 종속물이 됐음을 말해준다.

그나마 선거에서 경쟁이 살아 있는 수도권지역이라 해서 더 나을 것도 없다.

과거에는 민주대 반 (反) 민주라는 뚜렷한 쟁점이 있었으나 이것이 사라지고 난 후부터 선거의 쟁점은 지방선거든, 대선 (大選) 이든 오직 지역감정에 매달려 있다.

선거운동도 이를 부추기는 일과 상대방을 헐뜯는 네거티브 전략이 고작이다.

이런 실정이니 누구를 왜 뽑아야 하는지에 대해 유권자의 확신이 없다.

이 마당에 여야의 싸움만 더 극성스러워지고 있다.

이번 결과를 보고 정계개편을 하느니, 못하느니로 신경이 곤두서 있다.

선거는 점점 국민과는 멀어져가는 정치인들만의 행사가 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느냐를 생각하니 짜증만 나온다.

이번 선거에서 조금이라도 지역주의를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지역정당이 지배적인 지역에서는 무소속 후보가 대안이 될 수 있는지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지방정부에서 최소한 일당독재는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조차 불가능한 지역에서는 차라리 기권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기권도 하나의 의사표현이 될 수 있다.

투표율이 낮으면 그 지역정당에게 주민을 주머니 속에 넣은 것처럼 자만하지 말라는 경고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경쟁이 살아 있는 수도권과 강원,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적극 투표장에 나가 의사표시를 해야 한다.

여야가 이 선거를 모두 정치적인 의미로 확대해석하고 있는 만큼 여당에 힘을 모아주든, 야당에 견제의 힘을 주든 각자가 이에 상응하게 투표해야 한다.

지방선거의 본래 의미는 사라진 선거날 아침 찍을 데가 없어 고민하고, 기권까지도 고려해야 할 정도가 됐으니 한숨이 안 나오겠는가.

문창극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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