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된 대통령 전용기 하나 못 바꾸는 ‘한국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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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대통령 전용기 교체가 올해도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16일 “이명박 대통령 임기 내엔 전용기 도입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며 “전용기가 고가인 데다 경제 여건도 좋지 않아 도입 계획을 일단 접었다”고 밝혔다.


현 전용기는 1985년 도입된 노후 기종으로 탑승 인원(40명)이 적고 항속거리(3400㎞)도 짧아 우리 국력에 걸맞지 않다는 지적이 오래전부터 제기됐었다. 대통령 외국 순방이 잦아져 장기적으론 전세기를 활용하는 것보다 새 전용기를 구입하는 게 더 경제적이란 분석도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가 전용기 교체에 손을 뗀 이유는 야당의 반대 때문이다. 2006년 노무현 정부는 대통령 전용기 교체 예산(착수비 300억원)을 국회에 요청했지만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이 “경제가 어려운데 쓸데없는 짓 말라”며 막는 바람에 무산됐다.

2008년 이명박 정부도 전용기 교체 예산(착수비 140억원)을 올렸지만 경제위기를 이유로 내세운 민주당 등 야당의 반대에 부닥쳐 퇴짜를 맞았다. 추진 논리나 반대 논리 자체는 똑같다. 다만 여야가 뒤바뀌면서 서로의 입장이 180도 바뀌었을 뿐이다. 집권 경험이 생산적 정치로 이어지지 못하는 대표적 사례다.


①정파 이익이 국익에 우선=노무현 정부는 2006년 대통령 전용기 교체를 추진하면서 “새로 구입할 대통령 전용기는 지금 대통령이 타자는 게 아니라 다음 정부의 정상외교를 위한 것인데도 이를 예산 낭비나 불필요한 재정 지출로 보는 건 지나친 비판”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당시 한나라당 이재오 원내대표는 “전용기를 구입할 예산이 있으면 5만원 전기세를 못 내 촛불을 켜고 사는 수많은 빈곤층에 따뜻한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 해외 순방 때마다 한 번 빌리는 데 15억원이 넘는 전세기보다 적당한 전용기를 구입하는 게 더 경제적”이라며 “전용기가 일러야 2012년부터 운용되기 때문에 이 대통령이 이용할 수 있는 기간은 1년도 안 된다. 장기적 관점에서 구입하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작 청와대에 들어가니 노무현 정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러자 이번엔 야당이 된 민주당이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데 조금만 더 참으라”고 제동을 걸었다. 총 사업비가 수천억원대인 전용기 구매 사업은 속성상 여론의 호응을 얻기 쉽지 않다. 야당으로선 일단 반대하고 보자는 유혹에 흔들리기 쉽다.

②협상파보단 강경파가 득세=민주당에서도 전용기 교체 사업에 찬성하는 여론이 없었던 게 아니다. 지난해 9월 민주당 원혜영 원내대표는 “이 문제는 통수권자의 안전을 위해 당리당략으로 다룰 일이 아니다. 민주당은 대승적 차원에서 찬성키로 했다”고 말해 주목을 받았다. 민주당 예결특위 위원장이었던 최인기 의원도 “국위 선양 차원에서 대통령 전용기 도입 사업은 필요하다”며 지지했다.

그러나 연말 국회가 대치 국면으로 흘러가면서 야당에서 온건파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말았다. 2006년 한나라당이 대통령 전용기 도입 예산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던 것도 노무현 정부와 사사건건 맞붙으면서 당내에서 강경파가 득세했기 때문이다.

명지대 김형준(정치학) 교수는 “여당일 때 국익을 강조하던 정당이 야당이 되면 자기부정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며 “한나라당과 민주당 모두 집권 경험이 있는 만큼 ‘반대를 위한 반대’는 피하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정하·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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