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e칼럼

러시아 황녀 아나스타샤’의 흑막을 캐다 (5)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사라진 황녀의 미스터리는 허구로 끝났다. 아나스타샤 공주도 황제 니콜라이 2세 일가족이 처형될 때 함께 죽었다.

이제 자신이 러시아의 황녀 라는 것은 DNA지문 대조 결과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나스타샤 미스터리를 완전히 종결시키기 위해서 두 가지 일이 필요하다. 그녀가 묻힌 곳을 발견해서 이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을 속 시원히 밝히는 일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황후를 비롯해 세 명의 공주와 함께 우랄 산맥 동쪽 예카테린부르크의 한 지하실에서 총살당했다는 것은 밝혀졌다. 그러나 아나스타샤로 추정되는 한 명의 공주와 알렉세이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암살장소에서 6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2구의 유해 발견 돼

그러나 발굴작업을 진행하던 러시아 수사팀은 2007년 8월 예카테린부르크 인근에서 2구의 유해를 발견했다. 황제 일가의 유해가 발굴된 장소에서 불과 60여m 떨어진 지점에서다. 바로 알렉세이 왕자와 아나스타샤 공주의 시신으로 추정되는 유해다.

발견된 이 유해들은 불에 태워지고 황산이 끼얹어지는 등 심하게 손상된 상태였다. 그러나 러시아 국립대 연구진과 미국 MIT는 오랜 작업 끝에 유골 일부에서 검사 가능한 깨끗한(not polluted) DNA를 추출하는데 성공했다.

과학자들은 2008년 7월 DNA지문 대조결과 기대했던 대로 2구의 유해가 아나스타샤와 알렉세이 왕자의 유골이라고 밝혔다. 지난 90년 동안 숱한 영화와 소설의 소재가 돼왔던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미스터리 ‘사라진 황녀’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 무근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써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그리고 비운의 황녀로 불렸던 아나스타샤 공주를 비롯한 자녀 5명의 유골이 모두 DNA분석으로 확인된 셈이 됐다. 일가족 모두가 한꺼번에 처형됐다는 의미다.

앤더슨도 DNA 조사결과 폴란드 공장 노동자로 판명돼

비석에 적힌 안나 앤더슨의 생일은 아나스타샤 공주의 생년월일과 일치한다.

사라진 황녀는 결코 없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 미스터리는 완전히 거짓이었다. 그렇다면 아나스타샤라고 주장했던 안나 앤더슨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앤더슨의 본명은 프란치스카 스찬츠코브스카(Franziska Schanzkowska)로 밝혀졌다. 이 또한 DNA지문 검사를 통해서 밝혀진 사실이다.

사실 앤더슨이 자신이 아나스타나샤 공주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1920년대 이미 그녀가 1896년 12월26일 폴란드의 포메라니아(Pomerania, 당시는 프러시아 영토)에서 출생한 스찬츠코브스카라고 밝힌 바가 있다.

아나스타샤 미스터리를 밝히는데 앞장섰던 수사팀은 앤더슨의 DNA를 스참츠코브스카의 가족의 DNA와 직접 비교했다. 담당 과학자는 테리 멜톤(Terry Melton) 박사였다. DNA지문을 비교해본 결과 항간에 떠돌던 이야기가 맞아떨어졌다. 앤더슨은 공장 노동자 스찬츠코브스카라는 것을 확인했다.

외과수술 당시 도려낸 내장조직에서 DNA를 채취

앤더슨은 미국에서 죽으면서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그녀의 DNA를 채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1979년 버지니아의 한 병원에 조그마한 외과수술을 받으면서 그녀의 내장조직 일부를 도려내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병원은 그 조직을 잘 보관하고 있었다.

로마노프 일가족 DNA와 비교해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도 실은 이 병원에 보관된 앤더슨의 내장 조직이었다.

멜톤 박사는 앤더슨의 DNA를 스찬츠코브스카의 조카의 아들인 칼 마우처(Karl Maucher)의 DNA와 비교한 결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앤더슨은 사기꾼이었다.

그러나 앤더슨은 아나스타샤와 상당히 많은 신체적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1977년 법의학 전문가 모리츠 푸르트마이어(Moritz Furtmayer) 박사는 사진을 통해 두 여자의 귀에서 17군데나 동일한 조직형성을 발견할 정도였다.

어렸을 때와 성인이 됐을 때의 모습을 비교해서 동일인물인지를 가려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는 분석법으로 12군데만 같으면 거의 같은 사람으로 취급한다.

DNA지문은 중요한 과학수사기법으로 등장

DNA지문은 범인을 검거하는 과학수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수사기법으로 등장했다. 또한 억울한 누명도 풀어주고 있다.

강요된 자백이나 목격자의 거짓증언이 지금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과학수사 1번지 미국에서도 살인자로 기소돼 10여 년 넘게 옥살이를 하던 죄수가 무죄로 풀려나 인권국가라는 자존심에 먹칠하는 사례가 빈번히 일고 있다. 현장수사에서부터 과학수사(forensic science)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범인 검거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DNA 테스트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수사 기술이다. 또 억울하게 기소된 혐의자를 풀어주는 기술이기도 하다. 심지어 사형집행 24시간 전에 무죄로 풀려난 경우도 있다.

DNA지문을 통해 아나스타샤 미스터리를 끝났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미스터리가 남아 있다. 공장 노동자였던 안나 앤더슨은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대범한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일반인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러시아 황실의 비밀들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 수 있었던 것일까?

결코 단독 범행은 아니다. 앤더슨이 배우였다면 감독이 있을 것이다. 시나리오를 주도한 공범들은 누구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많은 추리작가들이 그들의 펜을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김형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