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기자 노숙자합숙소 르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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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16일 오후6시 서울역 광장. 30여명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추적거리는 빗속을 뚫고 하나 둘 광장에 세워진 승합차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이날 오후7시 첫 문을 여는 영등포 서울시립 근로자합숙소에 들어갈 실직 노숙자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들처럼/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우리는 항상 새로 처음처럼 시작한다' 합숙소 입구에 씌어있는 격려 시구 (詩句)가 IMF한파로 하늘을 지붕삼아온 이들을 맞는다.

이날 합숙소를 찾은 실직자들은 직접 찾아온 사람까지 합쳐 모두 42명. 같은 처지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입소절차를 마친 뒤 3개의 방에 분산배정될 때까지 수인사도 없이 한동안 서먹서먹해하던 이들이 눈을 빛내기 시작한 것은 일자리 정보교환이 시작되면서부터. "공공근로사업 신청은 어떻게 하는 거죠" "어데 막노동이라도 없습니까" - . 새 잠자리에 힘을 얻은 듯 일자리에 대한 '목마름' 이건만 모두의 목소리에 희망이 묻어났다.

느지막이 저녁식사로 나온 쌀밥과 무채.김치.나물.콩나물국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5분도 안돼 끝낸 이들에게 잠시나마 시름을 잊게 해준 것은 한국 - 자메이카의 축구경기. TV를 지켜보며 이 때만은 일자리.가족 걱정도 모두 잊은 듯 한국 월드컵대표팀의 일거수일투족에 탄성을 질렀다.

이윽고 오후10시30분쯤 잠자리에 들자 이들 사이에 절절한 사연들이 오갔다.

이삿짐센터를 하다 문을 닫고 거리로 나왔다는 李모 (52) 씨는 "일거리만 준다면 뭔들 못하겠느냐" 며 간절한 소망과 함께 각오를 다지기도 했다.

오전8시까지 모두 합숙소를 나가야 하는 17일 아침.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운 실직 노숙자들이 한사람 두사람 합숙소를 떠나기 시작했다.

모처럼 따뜻한 잠을 잤기 때문인지 조금은 펴진 얼굴로 일감을 찾아서 - . 김관종 기자 〈istor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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