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수철, 팔만대장경 테마음악 작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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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팔만대장경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95년 겨울 어느날. 가수 겸 작곡가 김수철 (42) 씨의 작업실을 찾은 고려대장경연구소장 종림스님이 살포시 합장했다. '작은거인' 김수철씨와 팔만대장경의 인연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8만4천의 번뇌와 몽고 침입에 대항하는 고려인의 정신을 담은 대장경의 글자 하나하나를 음악으로 표현해 보자는 스님의 제안에 김씨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록을 연주하며 노래했던 그가 중부.호남.영남의 삼도장단을 넘나들며 아쟁.태평소.피리.대금 등 우리 악기 열두가지를 배운지 10여년. '고래사냥' '서편제' 같은 영화음악과 서울올림픽 폐막식 등 테마음악을 작곡했던 그에게 우리의 소리를 서양의 운율에 띄워 세계에 내놓을 대작을 만들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국난극복을 위해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대장경의 정신을 음악으로 되살리는 일 아닙니까. " 어떻게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이처럼 어마어마한 작업을 시작했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의 반문이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팔만대장경이 숨쉬고 있는 해인사의 모든 소리를 담는 작업이었다. 96년 1월 뮤직엔지니어 7명과 함께 방송용 기자재와 고성능 마이크 25개를 들고 해인사로 향했다.

소산유무 (疎山有無.유와 무의 관계에 대한 선문답) 란 바로 이런 것인가. 30분만에 꺼지는 절밥에 허기지고 새벽 예불 전 꽁꽁 언손을 불어가며 기계설치 작업하기를 2주. 정성을 다해 녹취했던 해인사의 풍경.종.목탁소리들은 지나치게 성능이 좋은 장비덕에 '잡' 소리가 많이 섞여 '무 (無)' 로 돌아가게 됐다.

"막막하더라구요. 노력이 수포가 돼 허무하기 이를데 없고…. 서울 작업실로 돌아와 술과 담배를 끊었습니다. 7백년 세월 온국민이 합심해 만들고 보존해 온 유산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데 저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죠. "

다시 '유 (有)' 를 위한 밤샘 작업. 50여개의 악기와 수많은 연주자들이 동원, 3년동안 산고를 겪었던 팔만대장경 테마음악 1집이 42분으로 압축돼 세상에 첫 선을 보이게 됐고 앞으로 4집까지 나올 예정이다.

신시사이저와 서양.우리악기들이 대화하는 1집은^1악장 (서곡) - 다가오는 검은 구름^2악장 - 전장 (戰場)에서^3악장 - 구천 (九天) 으로 가는 길^4악장 - 천상 (天上) 의 문에서 등 4악장으로 구성돼 몽고의 침략과 이를 이겨내는 팔만대장경의 정신, 세계의 화합등을 표현하고 있다.

곽보현 기자

〈bohyunj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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