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 정리]재계비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우리 회사는 어떻게 되나. " 정리할 기업과 살릴 기업의 명단을 이달 말까지 확정하겠다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발언에 이어 11일 은행권에서 후속조치로 이를 위한 '표준안' 까지 마련하고 나서자 재계에 비상이 걸렸다.

특히 정리할 대상 기업을 '기존의 협조융자 기업과 부실징후기업' 이라고 밝히자 여기에 해당되는 기업들은 태풍권에 들어선 모습이다. 이들 기업들은 이에 따라 '살생부 (殺生簿)' 에 포함되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정보 채널을 총동원하는 등 급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재계는 정부의 이같은 조치에 따라 대기업 구조조정이 급류를 탈 것으로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기업들이 자산매각 협상테이블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일 것을 우려하고 있다. 또 금융기관들이 5월 한달간 부실징후 기업들에 대해 미리 자금회수에 나설 경우 시중 자금사정이 경색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비상걸린 협조융자 기업 = 협조융자를 받은 한화.동아.신호.신원 등은 이번 조치가 그룹의 장래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걱정하고 있다.

협조융자를 받은 모그룹 관계자는 "회장이 11일 오전 긴급 임원회의를 갖고 구조조정 일정을 최대한 앞당기라고 지시했다" 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그룹들은 5월말까지 융자금을 갚을 가능성도 희박해 대응방안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해당 기업들은 다만 "협조융자의 성격을 따져보면 생존 가능성이 높아 은행 스스로가 자금을 지원한 케이스도 있다" 며 천편일률적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불안한 부도기업 = 은행권이 화의나 법정관리가 진행중인 기업들을 정리대상에 포함될 것인지에 대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밝히자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기아.한라.뉴코아.진로 등 부도가 났던 그룹들은 다만 자신들에 대한 처리 일정이 당초 예상보다 앞당겨질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진로는 5개 계열사가 이미 화의절차에 들어간 데다 진로유통 등을 매각키로 한 만큼 주력회사인 ㈜진로 등은 살아남을 것으로 내다봤다. 한라도 미국 로스차일드사의 10억달러 브리지론 도입 등 자구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 정리대상에서 제외될 것으로 기대했다.

◇다소 느긋한 5대그룹 = 상위 5대그룹은 정부로부터 '자율적' 구조조정을 허락받은 데다 지난주에 발표한 외자유치와 한계 계열사 정리 등 구조조정계획이 정부로부터 '합격점' 을 받아 다소 느긋한 입장이다.

◇중소기업도 남의 일 아니다 = 중소기업들은 우량기업에 대한 집중 지원은 일단 환영하면서도 부실징후 기업의 판정에 대해서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마련이 급선무라며 다소 우려하는 분위기다.

이효차 (李孝次) 기협중앙회 이사는 "재무구조 위주보다는 기술력.장래성을 우선 따지는 평가기준이 마련돼야 할것" 이라고 말했다.

이영렬.홍병기 기자

〈young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