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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칼럼] 사내정치 1번지, 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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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를 보면 그 회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회사 내의 권력관계, 라인, 라인별 노선, 개인별 성격까지 모든 게 드러나는 자리가 회의인 것이다. 그래서 난 회의를 사내정치 1번지라고 생각한다. 여의도 국회를 정치 1번지라고 하듯이. 여의도 국회는 실제 주소도 (여의도동) 1번지다!

사내정치 1번지, 그 회의석상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격돌, 갈등, 암투, 거래, 그리고 etc. 여의도 국회처럼 해머가 등장하거나 멱살잡이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회의는 가끔 살벌하기조차 하다. 아! 회사 내의 회의 중에서 노사 간 회의나 주주총회 같은 곳에서는 폭력이 난무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회의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2명 이상의 다수인이 모여서 어떤 안건을 의논/교섭하는 행위’ ‘일정한 형식·규칙을 준수하면서 개별 의제를 다수결 원리 하에 능률적으로 결정해 나가는 진행 절차’ 역시 사전엔 좋은 말이 많다. 특히, ‘다수결 원리?’ 아주 맘에 든다. 그러나 현실은? 가끔은 다수결로 하거나, 또는 사다리를 타서 결정하기도 하지만, 주로는 그 놈이 결정한다. 그 놈!

그래서 회의에 대해 ‘회의’적인 사람이 아주 많다. 실제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많은 직장인이 회의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로 ‘개인이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건데, 할 이유 없는 회의에 억지로 참석해서’라고 답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그 놈들께서는 ‘자신 이외에는 의욕과 준비, 참여도가 너무 낮아서’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을 했다나? 그 놈들, 누군지 몰라? 여러분의 상사, 임원, 사장 따위의 사람들 말이야!

자, 많은 회의는 대개 이런 분위기로 시작하기 마련이다. ‘모두들 편하게 말해 봐’ 편하게 말하라고? 편하게 말하면 책임질래? 그래서 편하게 말했다면, 당신은 분명 신입사원이다. 나머진 그 말을 더 두려워한다. ‘차라리 말을 말지’ 편하게 말하라고 하고선, 언제나 뒤통수를 치는 그를 누가 감당한단 말인가? 그래서 적당히 몇 마디 거들거나, 그 놈님 말씀에 적절히 추임새를 넣는 것으로 역할 규정을 하기 마련이다.

물론, 안 그런 자도 가끔은 발견할 수 있다. G프로듀서도 그런 류인데, 회의만 열렸다 하면 본색을 드러내는 미스터리한 자들이 그들이다. 그들 중에도 다양한 부류가 존재한다. 좌충우돌형, 일단충돌형, 상시오버형, 허무맹랑형, 기발분출형! 이들은 회의만 열렸다 하면, ‘뜨~아!’ 진정한 영웅이 어떤 모습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I'll be back!' 그들도 공포스런 존재다.

회의석상에서 아주 기특한 모습을 보여주는 자들도 많다. 그들도 모두 같진 않다. 대세추종형, 침묵끄덕형, 신속정리형, 적당절충형! 이 가운데 가장 귀여운 형이 신속정리형이다. 언제나 바지런하게 상황을 정리하게 잽싸게 결론이랍시고 제시하면서 회의를 빨리 끝내려 애쓰기 때문이다. 회의를 빨리 끝낼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겠다는 기분이 들 때, 이들의 존재는 은혜롭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잘 정리가 안 되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그렇다면, 그 놈들은 어떤 부류들일까? 깜짝공세형, 교육훈시형, 마구주도형, 명령확인형! 그렇다! 그 놈들은 모든 이야기 다 들어주시고, 꼭 막판에 ‘짠! 너희들 이건 몰랐을 꺼야’ 라며,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던지거나, ‘역시 너희들은 더 배워야 해’ 라며, 길고도 긴 그 이야기를 되풀이하거나, ‘이러다 밤새겠네’ 라며 연출에서 액션까지 주도해버리거나, ‘실은 말이야’ 라며 미리 준비한 결정사항을 통지하고 사라지는 자들이다.

이상의 부류에 ‘차라리 침묵하고 마는 다수’인 토론기피형과 연장전도 불사하며 소통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 끈기소통형까지 더한다면, 거의 모든 유파가 정리되지 않을까 싶은데, 글쎄 더 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다양한 모습으로 진행되는 회의의 형태를 유형화하기는 불가능하지만, 난 크게 세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A형, H형, V형. 편의상 형상을 갖다 붙여 만든 분류이긴 한데, A형은 수렴해 가는 형을 말한다. H형은 평행선을 긋는 형이다. V형은 갈수록 더 벌어지는 형이다.

이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것은 A형이다. 처음에는 의견이 달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수렴해나가는 형이기 때문이다. 늘 A형으로 회의가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대개의 회의는 H형인 경우가 많다. 이견만 거듭 확인할 뿐, 좀체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경우다. 이보다 더 참혹한 경우가 V형인데, 회의를 계속할수록 견해차가 더 커지는 경우다.

만일 여러분 회사의 회의가 열기만 했다 하면 H형이나 V형으로 귀결된다면, 그 이유에 관해서도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대체 누가 문제인지? 혹시 내가 문제는 아닌지? 특히 여러분이 회의를 주재하는 위치에 있다면, 더 깊이 따져볼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은 통상적인 한국인은 토론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교육 받고 자라다 보니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인데, 그 결과 토론문화가 활성화된 외국계 기업에 입사를 하게 되면, 적응을 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토론장애는 이런 증세로 나타난다. 첫째, 회의를 할 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해한다. 둘째, 상대방이 문제점을 지적하면 도전으로 인식한다. 셋째, 평상시와 다른 언행을 보이곤 한다. 넷째,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지 못하면 화가 난다.

이런 토론장애 증상은 국회에서 멱살잡이를 유발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기도 한데, 토론을 하다보면 결국 싸움이 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회의 현실이다. 이 때문에 회의장은 종종 합의안을 만들어가는 합리적 과정이기 보다는 세력 과시의 장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회의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쏟아내야 하는 장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주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사망선고를 내리는 장이 되는 것,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회의를 정말 민주적으로 합리적으로 진행할 수만 있다면, ‘나쁜’ 사내정치의 폐해를 상당부분 줄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이종훈 칼럼니스트 rheeh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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