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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9> 언 강의 겨울낚시 ③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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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빨간새 작은새 /어째어째 빨개/ 빨간 열매 따먹었지.

하얀새 작은 새/ 어째어째 하얘/하얀 열매 따먹었지.

파란새 작은 새 /어째어째 파란가/ 파란열매 따먹었지.

내가 만약 식민지 교실에서 자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요즘 아이들처럼 영원히 기타하라 하쿠슈의 이 동요를 모르고 자랐을지 모른다. 그리고 한두 살만 더 나이가 많아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우는 아이였더라면 하쿠슈의 ‘파랑새’는 물론이고 녹두밭에 앉는 ‘파랑새’ 칠칠과 미칠의 ‘파랑새’가 아니라 서왕모의 전설의 중국 ‘청조(靑鳥)’밖에 몰랐을 것이다.

신화시대부터 새는 언제나 인간의 영혼(관념)이나 마음을 담은 상징물로 노래되어 왔다. 그런데 이 동요의 파랑새에는 어떤 의미도 느낌도 담겨 있지 않다. 파란 새는 파랗고 빨간 새는 빨갛고 하얀 새는 그저 하얗다. 어느 것이 더 아름답고 어느 것이 더 선하고 어느 것이 더 옳은 것인지 색깔만 다를 뿐 모두가 그냥 ‘작은 새’일 뿐이다. 이런 동요 속에서 색깔 논쟁은 무의미하다.

파랑새가 파란 열매를 따 먹어 파랗다는 것은 전연 과학적인 인과관계를 무시한 것이다. 단지 이미지의 현상적 연관성이 있을 뿐, “파랑새가 녹두밭에 앉으면 청포장수가 울고 간다”와 같은 어떤 논리적 인과의 사슬도 발견할 수 없다. 일본말의 ‘나제(なぜ)’는 원인을 캐고 결과를 따질 때 쓰는 ‘왜’ ‘어째서’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두 번이나 겹친 ‘なぜなぜ’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답하는 말은 너무나 싱겁고 엉뚱한 선문답으로 되어 있다. 과학적 인과관계가 전연 소거돼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듣고 자란 나에게는, 군가를 부르며 학교에 다닌 나에게는 참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는 동요일 수밖에 없었다.

이 동요는 1918년 아동문학지 ‘빨간새(赤い鳥)’의 창간호에 게재된 것이다. 작자인 하쿠슈는 “이 작품이야말로 내 동요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그 근원이란 바로 일본의 전통적 동요인 ‘와라베 우타(わらべ歌)’를 살려 당시의 독자에 대응하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하려는 정신이다. 실제로 그는 홋카이도(北海道) 오비히로 지방의 자장가에서 이 동요의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떡을 쪄 빨간 산에 올라가면 빨간 새가 쪼아 먹고 /파란 산에 올라가면 파란 새가 쪼아먹고 하얀 산에 올라가면 하얀 새가 쪼아먹는다”는 내용이다.

아동문학지를 직접 창간한 작가 스즈키(鈴木三重吉)의 말을 들어보면 그 뜻이 더욱 명확해진다. 그는 “저급하고 어리석은 정부가 주도하는 창가나 설화에 맞서 아이들의 순수성을 기르기 위한 이야기와 노래를 창작해 세상에 전파하는 운동을 벌이기” 위해 아동잡지 ‘빨간새’를 창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대동아 전쟁이 일어나 동요를 압살하고 군가 일색으로 아이들을 세뇌하게 될 날이 올 것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말이다. 일본의 영웅인 모모타로를 남의 나라의 보물을 빼앗아온 침략자로 그린 아쿠타가와가 이 운동에 가담해 있었던 것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일본을 군국화한 천황 원리주의자들이 군가를 낳았다면, 에도 때의 와라베 우타(동요)를 되살려 ‘사물을 나타나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이른바 사생파(寫生派) 문인들은 하쿠슈 같은 탈이데올로기와 탈원리주의 창가와 동요를 창조해 낸 것이다. 36년 동안 식민체제 밑에서 시달린 한국인들은 군국주의 일본 천황 원리주의에 가린 일본의 또 다른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준 일본의 판화 우키요에, 에즈라 파운드 같은 20세기 초 이미지스트들에게 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하이쿠 문학 등을 우리는 제대로 읽지 못했다. 파랑새에 단지 파랗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탈이데올로기의 즉물적 파랑새는 나에게 파란 지우개를 주었다. “아가야 울지 마라 잘 자라 우리 아기. 아빠는 씩씩한 힘센 군인 그 아이가 왜 울어… 먼 만주 벌판 비족 토벌하고 개선하는 아빠의 선물은 귀여운 우리 아기의 데쓰가부토(鐵帽).”

갓난아기에게 피비린내 나는 철모를 선물하겠다는 이 끔찍한 ‘군국 자장가’를 지울 수 있는 파란 지우개가 다름 아닌 이 하쿠슈의 ‘파랑새’였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 다음 회는 ‘바다를 발견한 한국인은 무섭다’입니다. joins.com/leeo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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