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연우무대 신작 '김치국씨 환장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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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이북출신의 황노랭이 김밥장수 김치국씨는 어느날, 뜬금없이 자신이 18억원의 거금을 북한동포돕기 운동에 기부했다며 몰려온 취재진의 인터뷰공세에 시달린다. 아무리 그런 적 없다고 해봐도 평소 돈 천원에 벌벌 떨던 남편이 야속하던 아내는 원성을 높이고, TV토크쇼에는 자신과 꼭 닮은 인물이 출연해 소감을 털어놓기까지 하니 김씨는 환장할밖에.

오는 15일 서울혜화동 연우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새 연극 '김치국씨 환장하다' 는 이런 상황을 감각적이고 빠른 대사와 경쾌한 장면전환으로 풀어낸다. 작가는 70년대에 '서울말뚝이' 등 마당극의 풍자전통을 살린 작품을 내놓았던 재미극작가 장소현. 그러나 방송마다 붐을 이룬 시사고발프로에서 최신 국제전화광고까지 오늘의 매스미디어에 대한 풍자적 장치를 작품 곳곳에 절묘하게 설치해낸 것은 톡톡히 각색의 힘이다.

아니나 다를까, 각색자 이윤철은 연극판 경험과 카피라이터 10년의 광고판 경험을 모두 갖춘 경력의 소유자.

이 정도만이라면 그저 '재미있는 풍자극 한 편' 에 그칠 법도 하지만, 이것이 '칠수와 만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등 사회비판의식 강한 작품으로 80년대를 풍미했던 극단 연우무대가 1년6개월만에 내놓는 신작이라면 좀 다르다. 80년대의 정치적 잔영 아래서 90년대를 버겁게 맞이했던 다른 모든 이들처럼, 혼돈섞인 성찰의 시기를 겪어온 연우무대가 본격적인 변신의 첫발을 내딛는 계기이기 때문이다.

속도감있는 연출로 '김치국씨…' 의 무대를 꾸려내는 연출자는 'Mr.매캔토. 씨!' '전쟁음? 악!' 등 재기넘치는 무대로 두각을 나타내온 극단 작은신화의 최용훈. 한때 '연출자군단' 으로까지 불렸던 연우무대가 '한국현대연극의 재발견' 시리즈같은 리바이벌공연 아닌 새 공연에 30대 외부 연출가를 수혈해온 것 역시 주목할 대목. 연우무대 정한룡 대표는 "과거 극작과 연출의 구분이 모호하다 싶을 만큼 연출가 중심의 작품을 해온 연우무대가 '극작 중심의 연극' 으로 방향을 틀었다" 고 토를 단다.

주인공 김치국 역의 강신일은 '칠수와 만수' 초연 당시의 만수. 김치국은 자칫 슬랩스틱 코미디언으로 빠질 법한 인물이지만 여간해서는 무게중심을 잃지 않는 강신일의 연기 덕에 극전체에 '연우무대' 적인 감수성이 유지된다. 그러나 '김치국씨…' 가 풍기는 분단상황에 대한 메시지는 죽을 떠먹듯 소화가 쉬워 이제는 다소 싱겁다. 연우무대 스스로가 인정하듯, 과거 분단문제라면 생쌀도 마다않던 관객들의 시대가 더이상 아닌 터.

'김치국씨…' 는 다음 세기 연우무대의 전형이 될까. 정한룡 대표는 '교두보' 란 표현을 고집한다. 이 한 가지 가능성을 출발로 앞으로 연우가 시도할 가능성이 그만큼 열려있으리란 기대를 던져주는 말이다. 다음달 21일까지. 02 - 744 - 7090.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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