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TV베끼기]하.독창성없이 살길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우리 방송의 일본TV 베끼기 중단이 시급한 이유는 비단 도의적인 차원 또는 저작권에 관한 문제만은 아니다.

베끼기는 우리 문화, 우리 문화상품의 경쟁력을 싹부터 자른다.

문화상품은 결국 창의력이 생명이며,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하지 않으면 국제무대로 나갈 수 없다.

경력 10년 남짓의 모PD.그는 지금껏 한번도 자신의 아이디어로 프로그램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먼저 윗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비록 검증되진 않았어도 자체적으로 만든 기획을 우선적으로 채택해야 합니다. 눈 앞의 시청률보다 우리 방송의 장기적인 경쟁력을 걱정해야 할 시점입니다. PD들의 마음가짐도 변해야 합니다.

자신이 낸 아이디어가 일본 모방 기획에 밀리는 일이 계속돼도 생각하길 포기해선 곤란합니다. "

자신의 기획으로 프로를 만들 때의 성취감은 베끼는 것과는 비교가 안된다.

KBS - 2TV가 지난 2월부터 방영한 '고승덕.김미화의 생생 경제연구소' .이 작품은 팀장 차형훈PD가 평소 갖고 있던 경제에 대한 관심, 얼마전 다녀온 미국 연수중 가졌던 고민들과 우리 현 상황을 종합해 만들어낸 순수 기획물이다.

경제와 코미디를 접목시킨다는 독특한 발상이 처음엔 낯설게 느껴졌지만 차츰 고정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차PD는 "PD생활 13년만에 처음으로 내 작품을 만들어본 것" 이라며 "방송인으로서 진정한 희열을 느낀다" 고 말한다.

오랜 개인적 관심과 상대적으로 긴 (약 3개월) 준비기간을 거쳐 탄생했지만 방영 3개월 동안 '영상이력서' '재테크' 2개 코너를 폐지하고 '경제민원' '스타 초대석' 2개 코너를 신설하는 등 수정을 거듭해야 했다.

방영 초기엔 프로듀서연합회보에 "정보와 재미의 두마리 토끼를 다 놓쳤다" 는 비판이 실리기도 했다.

새 아이디어 채택의 진통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최근에도 유니텔에 '생생 경제연구소는 좋은 프로인가' 라는 주제로 토론을 제의하는 등 프로그램 개선을 위한 고민을 멈추지 않고 있다.

제작진에 창의성을 요구하기 위해선 기획기간을 적절히 보장해줘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광운대 신방과 김현주 교수의 견해. "방송은 문화입니다. 일본 프로들이 모방의 대상이 되는 것도 문화가 비슷하기 때문이지요. 우리 방송사들도 제작진에 삶과 문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적.정신적 여유를 줘야 합니다. 지금처럼 창의성과 무관하게 시청률만 중시하는 풍토에선 고유의 아이디어가 나오기 힘듭니다. "

이와 더불어 표절에 대한 통제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방송사가 자체적으로 심의하는 것. 방송사들이 표절 가요에 대해선 '방송금지' 를 명하는 등 엄한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표절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난 자사 방송 프로에 대해선 방관하는 실정.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실질적으로 표절에 제동을 가할 수 있는 장치는 방송위원회 뿐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60조에 '모방금지' 조항이 명기돼 있으며 실제로 95년 10월엔 이를 적용해 MBC가 방영한 미니시리즈 '거미' 에 대해 '경고' 처분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심의 관계자의 말. "이것도 그냥 넘어갈 뻔했지요. 그런데 한 방송사에서 이 프로가 모방한 영화 '아라크네의 비밀' 을 동시에 방영했습니다.

증거를 녹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제재가 가능했습니다.

" 지금이라도 일본 방송을 녹화한 테이프만 있으면 처벌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방송위 관계자는 "증거자료가 있을 경우 제재를 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시정이 되지 않을 경우 반복적으로 징계를 내릴 수 있다" 고 말한다.

아울러 방송위측은 "지금 광고의 표절이 적발되고 있는 것엔 경쟁사의 제보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며 "만약 방송사중 한곳만이라도 베끼기를 중단하고 근절을 위해 힘써준다면 차단이 가능할 것" 이라고 밝혔다.

일본 표절은 방송사.방송위원회.PD중 어느 한 주체만이라도 근절 의지가 확고하다면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본 것을 모방해 나름대로 소화하면 되지 않느냐" 는 일부 방송관계자의 주장에 대해 성균관대 신방과 이효성 교수는 "방송 프로도 이젠 산업적 측면에서 바라봐야 하며 이의 핵심은 바로 독창성" 이라고 강조했다.

강주안.정용환 기자 〈jooa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