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정보기관의 과거청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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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속설 (俗說)에 따르면 '첩보원 (諜報員)' 또는 '스파이' 는 인류 역사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직업이다. 이 기묘한 직업은 국가와 법률 등 인간이 만든 제도가 어떤 상대적 성격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빼어난 능력을 지닌 스파이는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는 감시와 추적과 박해와 비난을 받지만, 바로 그 행위 덕분에 자기 나라에서는 많은 명예를 얻으며 때로는 영웅대접을 받기까지 한다. 첩보원의 세계에서는 선과 악의 구별이 없다. 오로지 유능한 첩보원과 무능한 첩보원이 있을 뿐이다.

정보기관의 몰락은 스스로를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로 착각하는 순간에 시작된다. 유능한 첩보원을 아무리 많이 보유할지라도 처참한 종말은 피할 수 없다. 마르쿠스 볼프 (Markus Wolf) 는 소련의 국가보안위원회 (KGB) 조차 그 탁월한 능력을 인정했던 옛 동독 슈타지의 총책이다. 이 '스파이 세계의 왕중 왕' 은 서독 연방총리 집무실에까지 고정간첩을 침투시키는 '빛나는 성공' 을 거두었지만, 2천만 국민이 서로를 감시하도록 강요한 잘못 때문에 결국 성난 군중에게 슈타지 본부를 점령당하는 파멸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세차례나 법정에 섰지만 '동독 국경 안에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서독을 상대로 벌인 첩보활동은 통일 독일의 법률로 처벌할 수 없다' 는 연방 헌법재판소의 판결 덕분에 형사처벌을 모면한 볼프는 텔레비전 토론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동독이 국민의 인권을 억압한 독재체제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피해자들에게 죄송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

정치공작과 인권탄압의 검은 얼룩을 지닌 안기부의 이름이 '국가정보원 (國家情報院)' 으로 바뀐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는 부훈 (部訓) 도 '정보는 국력이다' 에 자리를 내준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나라를 상대로 한 정보수집 활동은 뒷전으로 젖혀두고 자국민과 야당을 대상으로 한 사찰과 공작활동에 직원들을 동원했던 추악한 과거행위에 대해서, 여전히 권력의 일각을 점령하고 있기도 하고 감옥에 앉아 있기도 한 전직 중앙정보부장과 안기부장들은 여태껏 단 한마디 진솔한 사죄의 말을 한 적이 없다. 지금 진행중인 대한민국 최고 정보기관의 개혁은 믿어도 좋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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