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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죽음을 더듬어 보니 삶은 우연이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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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일곱번째 시집 『우연을 점 찍다』를 펴낸 홍신선 시인이 5일 도심 재개발 전후의 풍경이 교차하는 서울 순화동 뒷골목을 찾았다. 홍씨는 시집에서 늙어가는 육신을 재개발로 철거 돼야 하는 빈집에 비유한다. [김성룡 기자]

시인 홍신선(65)씨가 일곱 번째 시집 『우연을 점 찍다』(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갑년(甲年)이던 2004년 출간한 시전집을 빼면 2002년 『자화상을 위하여』 이후 7년 만이다. 홍씨는 1965년 등단해 오규원·박제천 등과 동인 활동을 했다. 40년이 넘는 한 시인의 시 이력을 한 두 줄의 설명글로 요약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자칫 놓치는 게 많을 것이다. 다만 김춘식·김수이 등 평론가들은 그의 최근 작업을 불교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윤리적 삶의 자세를 찾는 문사(文士)적 노력으로 보고 있다.

그렇더라도 그런 ‘일반론’ 안에 이번 시집을 구겨넣을 수는 없다. 진면목을 맛보기 위해서는 골골샅샅, 구체적인 시 한 편 한 편에 매달려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홍씨는 ‘시인의 말’에서 ‘감상 포인트’를 밝혀 놓았다. 우선 요즘 그에게 시는 “늙음과 죽음에 저항하는 몸의 전략”이다. 또 “호랑이를 올라탄 것처럼 시를 타고 달리다 결국 인생이 끝날 것인데, 운명은 물론 삶 역시 그런 우연이라는 생각에 곧잘 황홀해한다”고 밝혔다. 요컨대 이번 시집의 화두는 늙음·죽음·우연 같은 것들이다.

◆늙음과 죽음과 우연=그런 화두를 붙잡고 시집 안을 더듬어 나가기로 한다. 우선 늙음과 죽음. 홍씨는 지난해 초 대학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했다. 쓸 모 있는 사회·경제적 활동을 그만두게 됐다는 실존 체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퇴임(‘포상, 빛나는’)·낚시(‘죽음 놀이’)·말기암 환자(‘암 병동 6인실’) 등을 다룬 시편들이 늙음·죽음 언저리를 맴돈다. ‘성인용품점 앞에 서다’도 그런 시다. 홍씨는 ‘성애(性愛)적’ 또는 ‘재개발적’이라고 이름지을 만한 상상력을 통해 성인영화 또는 각종 성인용품 등으로도 “벌떡벌떡 일어서지 않는” 시의 화자의 부실한 아랫도리, “하초(下焦)”의 상황을 그린다. 기능 못하는 ‘하초’는 재개발 철거돼야 하는 빈집일 뿐이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인간의 궁리가 결국 돌아가는 곳은 삶일 것이다. 삶이란 어떤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불교의 영향이 느껴지는 시인의 잠정적 결론은 ‘삶=우연’이라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 매화꽃 사이를 그야말로 앵벌이하듯 앵앵거리며 돌아다니는 벌 한마리의 화분(花粉) 채취, 그로 인한 꽃의 수정 등 일련의 생명 과정은 시인에게 우연으로만 비친다(‘우연을 점 찍다’).

◆매화 체험=그런데 우연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결코 아름답거나 밝지 않다. 이곳에서 벚꽃의 낙화 현장은 “대살육판”이거나(‘벚꽃 대전’), 성냥 머리 크기 만한 봄철 “꽃망울들”은 설사하듯 단숨에 쏟아낸 죽음들일 뿐이다(‘무창포 가서’). 3부의 ‘마음經(경)’ 연작시들은 불교적 사생관이 두드러진다. 치유와 마음의 평정을 위해 불교적 철학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가 고통스럽다는 방증이다.

5일 홍씨를 만나 이번 시집 얘기를 들었다. 홍씨는 “하늘 아래 새로운 메시지가 있겠느냐. 시를 통해 나의 구체적 감각 체험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다”고 했다. 시의 메시지, 교훈, 이런 것들 다 떠나서 홍씨의 매화 체험 고스란히 느껴보시라.

“뒷방 벽에 똥이나 척척 이겨 바르듯/제 몸 엉덩이나 바짓가랑이에/얼어터진 꽃 몇 방울/민망하게 묻히고 선//치의(緇衣·검은 승려복)마저 나달나달 해진 오 척 단구의/매화 등걸/그동안 몸으로 꽃 열더니/이제는 똥칠인 듯/항문으로 여는가//모처럼 아파트 담벼락에 해바라기하고 선/그에게서/이념의 마비에서 풀린 송장을 발견한다/가진 것 없을수록 사람이 얼마나 고강해지는가를 발견한다//머지않아 앞산들/물렁뼈 닳은 무릎걸음으로 다가앉기 시작하리라/응결된 내상들 화농해 쏟아져 나오듯/나날이 녹음들 쏟으리라”(‘매화’ 전문).  

신준봉 기자,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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