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修羅의 길이 검사들의 숙명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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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35면

임채진 검찰총장이 결국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5일 사직했다. 27년 검사 생활을 “역부족이었다”는 소회로 마감했다. 임 총장은 큰 체구와 달리 깊은 불심(佛心)으로 남의 심정을 먼저 헤아리는 섬세한 성정이었다. 현안이 생길 때마다 걱정이 많아 ‘임꺽정’ 아닌 ‘임걱정’의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검찰 식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늘 강한 검찰보다 바른 검찰을 추구했고 ‘절제와 품격’은 평생의 화두였다. 임 총장은 소위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하면서 ‘검사의 길’과 ‘인간의 도리’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해 왔다고 한다. 절제와 품격에 천착하던 그가 수사에 매진하다 ‘상상할 수도 없는 변고’를 겪고 국민에게 사죄한 후 총장 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역설적 상황에 가슴이 아프다. 검사로서 숙명적 ‘업장(業障)’의 무거움에 소름이 돋는다.

인간의 삶의 방식으로서 검사는 결코 좋은 직업이 아니다. 검사들은 늘 도검이 난무하고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터, 소위 ‘아수라장’을 끝없이 배회하는 수라(修羅)의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종종 일본의 무사(武士)에 비유된다. 칼을 휘둘러 남을 다치게 하면 자신도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게 무사의 운명이다. 부정부패 척결이라는 명분이 아무리 화려해도 남의 범죄를 캐고 사람을 단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험하겠는가. 수사가 성공하면 수사 대상이 된 사람들의 인생과 행복이 파괴되거나 상처를 받는다. 그야말로 ‘업’(業)을 짓는 일의 연속이다.

불교의 육도윤회(六道輪廻)는 ‘하늘(天上), 인간,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을 말한다. 그 순서에서 알 수 있듯 수라도는 그야말로 인간 이하의 험난한 길, 자신과 남들의 피에 물들고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길이다.

요즘 검찰의 형세는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다. 칼은 부러지고 화살은 떨어졌는데 주위에는 온통 적군의 노래 소리뿐이다. 한때 ‘마피아의 총대로 만든 잣대’라는 희귀한 소리를 듣더니 이제는 막 나가서 ‘법견(法犬)’ ‘떡찰’ 정도는 점잖은 표현에 속한다. ‘살인검(殺人劍)’에서 급기야 ‘살인마’라는 극단적인 비난까지 듣게 됐다.

과연 우리 검찰이 이 정도까지 비난받아야 할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 검찰은 본질적으로 악역이다. 악역을 맡은 자가 인기를 탐내 주인공의 행동을 흉내 낸다면 바람직할까? 악역은 악역에 충실할 때 가치가 있다. 수사를 하다 보면 정치권·기업·관계(官界), 심지어 내부에서까지 적군이 늘어나는 암담한 상황에서 검사의 잘못과는 무관하게 자해 사건이 나거나 사람이 죽기도 한다. 또 중상모략이나 그에 따른 좌천으로 기가 꺾이기도 한다. 이해할 수 없는 판결로 울분에 휩싸일 때도 있다. 온갖 험한 일을 겪는다.

그럼에도 검사들은 국가와 공익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면서 험난한 수라의 길을 가겠다는 각오를 다진 사람들이다. 선의 편에 서서 악을 응징하고자 일부러 날카로운 눈과 무서운 모습으로 꾸미면서 따뜻한 본성을 감추어야 하는 귀면불심(鬼面佛心)이 검사들이다. 이런 검사들에게 좀 더 따뜻한 격려와 이해가 있기를 바라면 과욕일까?
대한민국 검찰은 부패 척결과 법 질서 수호라는 직무를 수행하면서 많은 시련과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군부·안기부, 이후에는 법원·경찰 등과 크고 작은 갈등을 빚었다. 정치권과는 숙명적으로 편할 수 없는 관계였다. 지금까지 검찰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왔다고 믿는 검사가 많다. 물론 검찰도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한다. 하지만 어려운 때일수록 악과 싸우는 본연의 직분에 충실하겠다는 각오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임 총장은 검찰의 업장을 홀로 짊어진 채 떠나갔다. 공직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면 사라질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 같은 것이라고 한다. 홀연히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이 안타깝지만 기껍게 보내드린다. 떠나는 것 또한 검사의 일생 중 한 조각이라는 것을 알기에.

데일 와서만의 뮤지컬 ‘라만차의 사나이’ 중 ‘이룰 수 없는 꿈(The Impossible Dream)’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겨 낼 수 없는 적과 싸우며,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견뎌 낸 채 부정한 악을 바로잡고 정의를 위해 싸우며 지옥 속으로라도 기꺼이 행진하는 돈키호테와 같이…’. 대한민국 검사들은 노래 속의 돈키호테처럼 패기와 사명감으로 무장했지만, 외로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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