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미꽃 앞에 무릎 꿇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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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호 02면

할미꽃이 햇살에 빛납니다.
봄을 알리는 할미꽃이 초여름 날, 마지막 꽃을 피웠습니다.
다 피워 고개 숙인 꽃과 한 키를 더 올려 흰 수염을 단 열매,
그리고 그 흰 수염마저 털어 낸 열매가 한자리에 있습니다.
무릎 꿇고 몸을 한껏 낮춰 할미꽃의 제 모습을 봅니다.
할미꽃의 세상살이가 한눈에 보입니다.
언뜻 생각이 지나갑니다.
평소에 내가 다른 이에게 마음을 얹어 무릎을 꿇은 적이 있는지, 이렇게 몸을 낮추어 상대를 대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동안 상대보다는 내 입장만으로 세상을 대했나 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제대로 살지 못한 겁니다.
그토록 멀리하고 싶은 수직적 질서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겁니다. 모두가 동등할 수 있는 수평적 질서를 꿈꾸며
아직도 수직적 질서에 몸을 담고 있는 나를
할미꽃이 깨우쳐 줍니다.

PHOTO ESSAY 이창수의 지리산에 사는 즐거움


이창수씨는 16년간 ‘샘이깊은물’ ‘월간중앙’등에서 사진기자로 일했다. 2000년부터 경남 하동군 악양골에서 녹차와 매실과 감 농사를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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