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스타일]라디오DJ에 띄운 숱한 엽서, 이젠 팩스·PC통신으로 대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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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안녕하세요, DJ아저씨. 저는 김말자라고 합니다. 오늘따라 별이 찬란하게 빛나네요. 비지스의 '하우 디프 이즈 유어 러브' 가 듣고 싶어요. 같이 듣고 싶은 친구는…" 나이 서른 줄을 넘어선 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라디오 심야 프로그램에 이같은 엽서를 띄워봤을 것이다.

눈길을 끌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았던 글들…. 친구에게 연락을 해놓고 방송을 기다리던 마음은 또 얼마나 초조했던지. 각종 퀴즈 응모에도 엽서는 자주 이용됐다. 당첨확률을 높이기 위해 수십 장씩 보냈다.

그리고 발표일, '경찰서 순경의 입회하에 인기탤런트 씨가 추첨한' 당첨자 명단을 두세 번 훑어내리며 자신의 이름을 뒤지던 기억이 그리 오래지 않다.

하지만 엽서는 이런 낭만을 뒤로 한 채 차츰 사라지고 있다. 정보통신부의 통계에 의하면 최근들어 엽서 발행량은 급격히 감소하는 추세다.

80년대 2억여 장이었던 것이 90년대 들어 1억 장 수준. 지난해 1백70원짜리 관제엽서 발행량은 9천7백여만 장에 그쳤다. 정보통신부의 나재안 서기관은 "엽서는 사신 (私信) 보다는 각종 모임 홍보나 공공기관의 안내장으로 사용될 뿐" 라고 얘기한다.

엽서가 비운 자리는 팩스.PC통신.700 전화서비스 등 첨단 정보통신매체가 메우고 있다. 신속.편리함을 당할 재간이 없지만 엽서에 비해 아무래도 정성이 덜하다. 현재 방송국에 신청곡을 보내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수단은 팩시밀리. 방송 도중에도 사연을 보낼 수 있다.

그래서 방송국의 팩스는 늘 폭주상태다. PC통신 역시 즉각적이고 간편하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어 리퀘스트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간혹 엽서를 집어들라치면 대개 30대 이상이 주인공이란다.

전달 수단이 바뀌다 보니 내용도 변한다. 왕년의 명 DJ 박원웅 (MBC아카데미 상무) 씨의 이야기. "과거 엽서에는 꿈과 낭만이 담겨 있었다. 통신이나 팩스로 들어오는 사연은 간결하게 요점만 적고 있다. 또 일회적인 유머나 '이건 이렇게 잘못됐다' 는 식의 시비를 가리는 내용이 많다. "

엽서에 들이는 정성도 예전만 못하다는 것이 방송국 담당자의 이야기다. 이러다 보니 MBC에서 매년 개최하던 '예쁜 엽서전시회' 도 95년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95년 당시 오랜만에 개최한 행사라 많은 기대를 했다. 하지만 수상작을 고르기 어려울 정도로 수작은 드물었다. " 박원웅씨의 말이다.

퀴즈응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상품 소개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열리는 각종 퀴즈 이벤트에 많이 사용되는 수단은 700서비스. 대행업체들은 응모자 부담의 부가사용료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뿐 아니라 컴퓨터로 모두 처리가 가능하다는 간편함 때문에 이 방법을 선호한다.

아울러 PC통신이나 팩스도 자주 사용되는 매체다.

마케팅 차원의 이점도 있다. 퀴즈 대행업체 '지컴' 의 관계자의 경우 "700서비스를 이용하면 응모자가 자신의 주민등록번호와 거주 지역을 입력해야 하므로 고객 분석에 도움이 된다" 는 입장이다.

하지만 엽서엔 사람의 체취가 묻어있다. MBC '별이 빛나는 밤에' 의 이은주PD는 "아무래도 청취자의 정성과 사색이 담긴 엽서 쪽으로 손이 절로 가게 된다" 고 말한다. 세상이 변해 속도와 편의를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손때가 꼬질꼬질 묻은 엽서 한 장 받고 싶은 마음이야 여전하지 않겠나.

문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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