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실기하는 경제정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이후 외국인투자가 오히려 급감하고 있다. 정부.재벌.금융 개혁의 부진, 노사관계의 불확실성, 실업의 증가에 따른 사회불안, 여소야대에 의한 정치적 불안정 등의 악재 (惡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은 제2기 노사정 (勞使政) 위원회에 불참하는 한편 대규모 파업도 불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작금 노사정의 행태를 보면 과거 88년의 여소야대 시절에 와 있는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든다.

문제가 이렇게 악화된 데는 정부의 책임이 크다.즉 구조조정.고용조정간의 관계 설정, 실업대책 등 긴급한 경제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일관성 있는 청사진이 없고 이를 총괄해 수행할 정책부서도 없는 실정이다.

구조조정을 강조하면서 정리해고는 모든 해고회피노력을 시도한 후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도 모순이다. 한국 경제가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기업.금융권의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이에 따라 물가안정과 국제수지의 개선, 그리고 외환유입을 가속화하는 방안 뿐이다.

이렇듯 우리경제의 회생은 구조조정의 성패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경영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구조조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용조정이 원활해야 한다.

즉 정리해고가 용이할수록 구조조정이 성공할 가능성이 크며, 궁극적으로 고용을 창출 (創出) 할 수 있는 효과적인 실업대책이 될 수 있다. 이는 1차 석유파동 때의 물가정책이 시사하는 바이기도 하다.

73년 석유파동때 대만은 물가인상요인을 모두 반영한 결과 74년에는 47.7%의 물가 급등을 보였으나 75, 76년중 5.3%, 2.4%로 물가안정을 이룬 바 있다.

반면 한국은 물가억제를 시도한 결과 74년의 물가는 24.3%에 머물렀으나 75, 76년중 25.4%, 15.3%의 소비자물가인상률을 보이는 등 그 여파가 8년이나 지속된 적이 있다.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서는 노사간 갈등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완충적 기능을 담당할 중산층의 역할이 중요하다.

언론은 일반국민에게 '알 권리' 를 제공하는 의무에 충실해야 한다. 지난 2월 중순 당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의 "대기업은 3~4개 또는 5~6개의 핵심기업을 빼고는 정리해야 할 것" 이라는 언급의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한 정보를 제시한 언론은 아직까지도 없다.

이러한 불투명성하에서 재벌개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업대책은 근본적으로 구조조정의 성공적 추진을 위한 전제조건, 즉 비용효과적 복지정책과 교육.훈련을 통한 고용 가능성의 제고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실업대책의 기초가 불분명한 상태에서 어떻게 해서든 실업자 2백만명은 막겠다든가, 또는 낙관적인 전망에 따라 벤처산업에 무분별하게 과잉투자를 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장기적인 산업구조발전 구상의 기본틀에 맞춰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이의 시너지효과를 극대화하는 실업대책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취업자.실업자.비경제활동인구에 대한 연령.기능.학력별 표본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현 우리의 정치구조하에서는 구조조정.산업대책의 다양한 정책방안중 '최종분석 후 최종의사 결정' 을 내리고 이에 대한 평가를 받을 대상은 대통령밖에 없다. 2기 노사정위원회를 기필코 성사시키겠다든지 또는 이에 시간이 너무 소요되는 경우 경제정책의 실기 (失機) 를 우려해 차선책을 강구할 것인지 여부도 대통령 결단에 속하는 문제다.

민주노총은 한국노총과 함께 하루 속히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기를 촉구한다. 아무리 노사정 삼자주의 (三者主義)가 어렵고 민주노총 집행부가 이 위원회에 참여해 얻을 것이 없고 오히려 어용성 시비에 휘말릴 개연성이 있다 하더라도 현 우리 경제의 위기상황을 판독해 파업을 자제하고 위원회에 참여하는 진정한 용기와 정직성을 보여야 한다.

국민들은 책임을 질줄 알고 민의 (民意) 를 받아들이는 성숙한 노조를 원하고 있다.

김재원<한양대 교수.경제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