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택해 호의호식하는 학살 원흉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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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킬링 필드' 의 주역이었던 폴 포트는 정글속에서 연금생활을 하다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다.그러나 권좌에서 쫓겨난 대부분의 독재자.학살자들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안락한 말년을 보내고 있다.

이들에겐 소위 '정치적 망명' 이 피난처로 악용되고 있다.70년대 우간다의 악명 높은 독재자 이디 아민 (72) 은 사우디아라비아 지다에서 네명의 부인 및 20여명의 자녀와 함께 노후를 즐기고 있다.

대형 슈퍼마켓에서 짐수레를 끌며 쇼핑하는 모습이나 길거리에서 흰색 시보레를 몰고다니는 모습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30만명의 목숨을 빼앗았던 그는 정적을 살해해 악어밥으로 던져주고 아돌프 히틀러를 자신이 따르는 모델이라고 공언했던 폭군이었다.

우간다 지도자들은 그에게 귀국해 재판을 받도록 요구하고 있지만 사우디 정부를 압박하는 등의 강력한 조치는 취하지 않고 있다.중미의 아이티에서 '아이티 진보발전 전선' 이라는 준 군사조직을 이끌었던 에마누엘 콘스탄트 (일명 토토) 는 90년대초 수천명의 양민을 살해하고 고문했던 주범이다.그러나 그는 94년 미국의 침공으로 아이티를 탈출한 뒤 현재 뉴욕의 퀸스지역에서 잘 살고 있다.

미국은 현재 아이티의 사법제도 아래서는 적절하게 재판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돌려보내지 않고 있다.그러나 그는 자신이 과거 미 중앙정보국 (CIA) 의 유급 정보원이라고 말한 바 있어 미국이 그를 보호하는 배경을 짐작케 해준다.

유엔 조사관들이 80년 미국 수녀들의 살해 및 이의 은폐에 개입했다고 결론내린 엘살바도르 전 국방장관 호세 가르시아 기예르모, 전 국가방위사령관 카를로스 카사노바 등도 지금 미 플로리다주에서 살고 있다.보스니아 세르비아계 리더인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도 유엔과 미국이 전범재판소에 회부하겠다고 벼르지만 정작 미군과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군이 지키는 길목인 아드리아해에서 다뉴브강까지 별 어려움 없이 돌아다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인권단체들은 '현실정치' 를 이유로 정치망명이 남발되고,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한 국제사회의 처벌의지가 약하며, 독재자들이 권부에 있을 때 축재한 돈과 연줄이 나름대로 힘을 발휘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특히 정치망명과 관련해서는 미국의 무원칙하고 자기편의적인 태도가 가장 큰 문제라고 비판하고 있다.

뉴욕 = 김동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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