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왕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9면

1980년대 군사정부가 강압적인 통치를 펼칠 때 유행한 우스개가 하나 있다. 쌀이 부족해 굶는 사람이 많다는 소식을 들은 통치자가 “쌀이 없다고? 라면 끓여 먹으면 되잖아”라고 반문했다는 얘기.

동서고금 가리지 않고 나오는 버전이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뒤 1793년 교수대에서 처형을 당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도 사람들이 먹을 빵이 없다고 하자 “빵 대신 과자를 먹으면 되잖아”라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제 한 말은 아니고, 왕조 권력의 부패와 사치를 미워한 일반인들이 만들어 퍼뜨린 얘기라고 한다.

통일 왕조인 진(晋)을 세운 무제(武帝)의 아들 혜제(惠帝)는 중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임금으로 이름을 올린 사람이다. 지능이 다소 떨어지는 사람이었지만 부친의 총애를 받아 황제 자리에 오른다. 전국 곳곳에 심한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끼니 걱정에 잠을 못 이룰 때였다.

신하가 이 사정을 아뢴다. 그의 대답이 걸작이다. “쌀이 부족하다면 고기 죽을 끓여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듣는 사람들이 웃음을 참느라 꽤나 힘이 들었을 법하다. 이 어리석은 황제의 권력이 오래갔다면 이상하다. 곧 권력투쟁에 휘말려 자리를 내놓는다.

왕조의 권력자는 민고(民苦)를 제대로 헤아릴 수 없다. 이를 경계한 사람은 안자(晏子)다. 제(齊)의 경공(景公)이 어느 추운 겨울날 갖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온 뒤 “날씨가 춥다는데 나는 전혀 못 느끼겠네”라고 말했다. 안자는 즉시 “덕이 있는 통치자는 자신의 배가 부르면 거꾸로 남이 배고픈지를 따져 본다”고 말을 받았다.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어 추위를 못 느끼는 임금의 안일함을 지적한 말이다.

‘부잣집 대문에선 술과 고기 썩는 냄새가 풍기고, 길에는 얼어 죽은 사람의 뼈가 뒹군다(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는 두보(杜甫)의 시는 견제 장치가 따로 없는 왕조 권력이 부패했을 때의 사회상을 전하고 있다.

이런 얘기들의 북한식 버전은 이럴 것이다. “조금 굶으면 어때, 우리한테는 핵무기가 있잖아!” 그런 상황 속에서 북한이 김씨 일가가 내리 3대를 세습하는 왕조의 틀을 확정한 모양이다. 그 절대적인 독재체제에서 굶주림에 허덕일 북녘 동포들의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그 길 위에 굶어 죽은 자의 원혼이 떠도는 것은 한반도의 큰 비극이다. 참 원망스러운 김씨 왕조다.

유광종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