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시시각각

카산드라의 경고를 들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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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미국 동화책에 나오는 얘긴데 지금 우리 모습을 두고 하는 말 같아 낯 뜨겁다. 심각한 문제란 국론 분열이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모두’가 맡은 책무가 사회 통합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하리라 여기며 스스로는 ‘아무도’ 화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태풍의 눈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6월의 태풍은 사상 유례없는 초대형 싹쓸바람이다. 전임 대통령의 죽음으로 더욱 불길 거세진 좌우 갈등, 벼랑 끝으로 내달리는 열차 같은 북한의 도발, 극한 대결을 예고하며 재점화하고 있는 노동계의 하투(夏鬪), 한시 급한 비정규직법 등 산적한 현안을 못 보는 근시안 정쟁(政爭)…. 동시다발적 대형 악재들이 잔뜩 습기 품은 거대한 구름벽을 형성하고 가공할 힘을 축적하고 있다.

그 앞의 우리는 무기력하다.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사안마다 편 갈리어 물어뜯고 싸운다. 실낱 국운을 허물어져 가는 산성 하나에 맡기고 있던 병자호란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싶다. 김훈은 소설 『남한산성』에 썼다. “밖에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그때는 글 읽는 자들만 싸웠지만 지금은 온 국민이 싸운다. 반으로 갈린 남한 땅 백성들이 또다시 반으로 나뉘어 모질게 싸운다. 이편 아닌 저편이 싫다 보니 저편이 하는 일들은 무조건 싫다. 그 싫음이 미움이 되고 증오로 끓어올랐다 원한으로 곰삭는다.

글로벌 경제위기의 쓰나미가 휩쓸고 간 자리에 또다시 몰아칠 6월의 태풍 앞에서, 그러한 분열과 반목의 결과는 누가 봐도 대재앙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경고음은 곳곳에서 들린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트로이 성문 밖에 목마를 남겨두고 사라졌을 때 예언자 카산드라는 위험을 경고했지만 비웃음만 샀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는 장편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노래했다. “무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목마 안에서 신음소리가 메아리 친다/거짓 승리에 도취하고 저주의 운명에 눈먼 트로이인들은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인다/카산드라는 울부짖었다/불행한 시간을 저주하고 트로이의 운명을 예언했다/모두가 들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후 트로이의 운명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재앙이 내려앉고 나서 깨달아야 무슨 소용 있으리. 더 늦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 낡은 이념의 가위로는 위기 극복을 재단할 수 없다. 한 걸음씩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어야 한다. 말을 뱉어내기 앞서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악순환만 부르는 편 가르기에서 벗어나 무엇이 글로벌 스탠더드인지 돌아봐야 한다. 거기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적정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대립의 판을 뜯어내고 화해와 공존의 틀을 쌓아 올려야 한다.

6월 태풍이 끝이 아니다. 이후에도 공기업 구조조정, 차세대 성장동력 발굴 육성, 일자리 창출 같은 어려운 과제가 줄지어 있다. 국론을 모아 국가 역량을 최대치로 끌어올리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각계각층에서 ‘모두’가 나서야 한다. 분열을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다면 모두가 꾸짖고 바로잡아야 한다. 모두가 해야 하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고서 때늦어 누구를 탓해봐야 무슨 소용이냔 말이다.

이훈범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