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GI 빌과 '실업자대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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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동전쟁이 났을 때 어느쪽이 이길 것인가는 그 나라 유학생을 보면 알 수 있었다.아랍학생은 자취를 감추고 이스라엘학생은 총을 메러 귀국했기 때문이다.

6.25에 버금가는 혹독한 전쟁이 터졌을 때 한국 유학생은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남아서 버틸 것이냐, 돌아가 군 식구를 늘리는 게 애국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때 5만명에 이르던 재미 유학생의 30%가 빠져나갔다.본국에서 오는 실탄이 떨어졌기 때문이다.거품경제시대 유학생은 송금이 끊기면 오도가도 못한다.접시 닦아 고학하던 옛 유학생의 눈물 젖은 빵을 알 턱이 없다.

'버스보이' 일자리가 났다 해서 버스차장인 줄 알고 달려 갔더니 식당청소일인 것을 알고 놀란 학생도 있었다.삼미그룹 부회장이 웨이터로 변신해 화제지만 웨이터는 아무나 못한다.매무새 단정하고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까다로운 주문을 받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 인심도 박해져 외국학생에게 노동허가를 내주지 않는다.교포 가게에서 맥주상자를 날라주고 시간당 8달러를 버는 것이 고작이다.먹는 것은 한끼쯤 줄인다 해도 방값이 버겁다.남녀학생 합방 (合房) 까지 생기고 있다.딸 가진 부모가 기겁해 쳐들어와 봤자 IMF 새 풍속도에 혀를 찰 뿐이다.

실업률이 사상 최저여서 미국이 노동천국인 듯해도 한꺼풀 벗겨보면 장밋빛만은 아니다.미국의 총취업자가 중국의 실업자 수보다 적다는 우스개도 있지만 이른바 '템프' 시대가 열리고 있다.

템프는 말 그대로 템포러리 (임시고용) 여서 하루살이나 진배없다.주식배당은커녕 베니핏 (각종 혜택) 도 없이 주 50시간 이상을 때우는 템프가 2백50만명이나 된다.인텔.AT&T 등 내로라하는 첨단기업도 템프로 메우고 있어 '만성템프 (Permatemp)'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만여 사원중 이같은 뜨내기가 5천명에 이른다. 요즘 반 (反) 독점법 위반으로 곤욕을 치르는 빌 게이츠 회장은 청문회에 불려나와 의원과 경쟁자에게 쥐어짜이자 "나보다 나은 창의력이 나오면 나도 언제 실직자가 될지 모른다.경쟁 않고 창의력도 죽이자는 것인가" 고 대들었다.

고등학교 과학 및 수학경시에서 미국이 꼴찌로 처져 기술대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논란도 일고 있다.하지만 한쪽에서는 수학시험 일등국인 싱가포르와 한국이 '꼴찌' 의 성공비결을 배우러 오는데야 어쩌겠느냐고 느긋하다.

고등학교까지는 느슨하지만 대학이 건강한 것이 비결로 꼽힌다.세계 1백대 대학을 미국이 휩쓸고 있지 않은가.우수 두뇌가 미국으로 몰려들어 이공계 박사의 4분의1이 외국 출신이다.새로운 변화에 적응훈련시키는 기업대학 (Corporate University) 의 힘도 빼놓을 수 없다.

하이테크 일을 템프가 해낼 수 있는 것은 이같은 직업훈련 덕이다.실직자와 대학은 연 (緣) 이 깊다.전에는 실직자에게 어디 다니느냐고 물으면 먹고 논다는 말 대신 '먹고 대학생' 이라고 한적이 있다.

'먹고 대학' 의 원조 (元祖) 는 트루먼 대통령의 GI빌 (法) 이 아닌가 싶다.2차세계대전이 끝나 제대군인이 쏟아져나오자 돈 대신 대학교육을 선사한 것이 GI빌이다.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한 병사들이 트루먼장학생이 된 것이다.마셜플랜이 잿더미속에서 유럽문명을 살려냈다면 GI빌은 실업자에 묻힐 뻔한 미국을 구한 탁월한 실업대책이었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까지 기업대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전후 실업.대학.산업을 일거에 일으킨 일석삼조 (一石三鳥) 의 정책효과였다.우리에게도 실직자가 다닐 '먹고 대학' 은 없는가.몇푼 보조금보다 재기 (再起) 의 발판이 될 실업자대학 말이다.

최규장〈재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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