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선체이서' 서구문명 병리 대안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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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마이클 치미노는 불운한 감독이다.35세에 만든 '디어 헌터' (78년)가 아카데미 작품.감독상을 타면서 그는 일약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으로 부상했다.그러나 2년 뒤 유명한 '천국의 문' 사건으로 하루 아침에 할리우드 영화사들의 기피인물이 돼 버렸다.

이후 15년동안 고작 3편을 연출했으나, 그마저도 고만고만한 수준으로 별 평가를 받지 못했다.18일 개봉되는 '선체이서' (96년) 는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던 그가 야심적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그 해 칸영화제 집행위원회가 편집도 덜 끝났던 이 영화를 공식경쟁부문에 서둘러 초청한 것은 '디어 헌터' 에 대한 경의의 표시였으리라. '디어 헌터' 는 베트남전쟁을 진지하게 다룬 최초의 미국영화였다.여기서 그는 전쟁이 초래한 광기와 인간성의 파탄에 주목했다.

'선체이서' 에서는 보다 원숙해진 시각으로 현대서구문명을 비판하는 입장에 선다.블루 (존 세다 분) 는 의붓아버지를 살해한 혐의로 감방생활을 하던 중 희귀한 악성종양에 걸려 2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담당의사는 실력을 인정받아 출세길을 달리는 마이클 (우디 해럴슨) .그러나 블루는 치료를 거부한다.

현대의학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인디언 혼혈인 그는 '신비의 호수' 에 가면 자신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다.

'선체이서sunchaser' 란 그 호수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려준 인디언 예지자의 이름. 결국 그는 의사 마이클을 인질로 잡고 선체이서가 일러준 곳을 찾아간다.경찰의 추적을 피해 모하브사막 - 유타의 황무지 - 록키산 - 캐년랜드로 달리면서 영화는 로드 무비로 바뀐다.

'올리버 스톤의 킬러' '래리 플린터' 에서 괴퍅한 인물로 나왔던 우디 해럴슨이 겉으론 냉정하지만 내면은 복잡한 과거를 가진 인물로 나온다.또 신인 존 세다가 브라질 축구선수 호나우도처럼 빡빡 머리를 밀고 나와 빈민가에서 자란 아이 특유의 거칠지만 따뜻한 심성을 가진 역을 해낸다.

두 인물의 대조적인 성격설정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물질주의와 정신주의, 서양과 동양,가진 자와 못 가진자라는 이분법적인 대립 위에 서 있다.치미노감독은 서구문명의 병리는 '내면으로 침잠' 함으로써 극복가능하다고 본다.

카메오로 출연하는 앤 밴크로프트가 "네 마음 속의 신성함이 치유의 힘을 갖고 있어" 라고 충고하는 장면에서 특히 그렇다.그러나 주제가 선명할 수록 영화는 빈약해지기 마련. 치미노의 웅대한 문제의식에도 압도당해 인물들의 성격과 스토리가 단순하고 앙상해져 버렸다.

'디어 헌터' 에서 치미노감독의 총기 (聰氣) 를 기억하는 왕년의 팬들에게 '선체이서' 는 안타까운 짧은 탄식을 짓게 한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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