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쿵제, 무기력한 항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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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면

<결승1국> ○·쿵제 7단 ●·이세돌 9단

제20보(152~165)=쿵제 7단은 얼마 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이세돌 9단을 꺾었다. 아마도 감회가 깊었을 것이다. 쿵제가 이세돌에게 당한 게 몇 번인가. 아무리 좋은 바둑도 결국은 지고 난 뒤 스스로를 얼마나 책망했을까. 한데 이번엔 역전승이었다. 그 승리 이후 쿵제는 연전연승이다. 이런 게 바로 승부사의 팔자다. 운 좋게 한 번 이기면 그때부터 뭔가 달라진다.

152로 뒤늦게 찔렀으나 흑의 유일한 약점이었던 이곳은 이미 흑▲로 인해 굳게 뒷문이 잠긴 상태. 기껏 158을 선수하는 정도로는 승부를 논할 수 없다. 애당초 계산했던 대로 백이 승부를 보려면 A선까지 진출해야 했는데 지금 흑집은 그 선에서 10집 이상 부풀어 올랐으므로 계산은 해 보나 마나 대차다.

165에서 쿵제는 돌을 던졌다. 하변에서 공격 기회를 잡았고 전국의 상황은 유리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시간 연장책을 쓴 것이 끝내 이 같은 대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대목에서 전광석화처럼 승부의 끈을 틀어쥔 이세돌 9단의 승부 호흡은 실로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대담했고 훌륭했다. 바둑은 유리하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고 불리하다고 지는 것도 아니다. 승부에서 역전승이 절반 이상이란 통계가 그걸 말해 준다. 하지만 이 판에서의 쿵제는 기(氣)에서 너무 밀려 있었다. 쉽게 말하면 이세돌 9단에게 겁먹은 듯 도통 승부수를 던지지 못했다. 방으로 돌아간 쿵제는 자신의 무기력함, 이미 무너졌는데도 옥쇄를 감행하지 못한 소심함에 더욱 자괴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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