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설비투자]금년 신규투자 이미 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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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투자요? 돈이 어디 있습니까. 설사 있다고 해도 금리가 연 20% 가까운 상황에서 시설 늘리는데 투자할 기업은 별로 없을 겁니다.

게다가 98년말까지 부채비율을 2백%까지 낮추라는 판에 어떻게 투자할 엄두조차 낼 수 있겠습니까. " 한 대기업 임원의 말은 최근 업계 분위기를 한마디로 대변하고 있다.

또 다른 기업인은 "빅딜 (대기업간 사업교환) 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또 있는 회사.시설도 없애야 할지 모르는 판 아닙니까. 올해 신규 투자는 물 건너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고 덧붙였다.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투자심리가 꽁꽁 얼어붙었다.

새로 사업을 벌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도중에 공사를 그만두는 곳도 나타나고 있다.

Y철강은 당초 올 연말 완공예정으로 서울대치동에 짓고 있던 지하 6층.지상 19층짜리 강남사옥 건설을 최근 무기한 보류했다.

덩치 큰 중화학공업 분야가 특히 심각하긴 하지만 업종.규모 구분없이 대부분 상황은 비슷하다.

이와 관련, LG경제연구원의 전진 (全珍) 선임연구원은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투자부진→실업확대→소비위축→경기침체→투자위축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은 물론 국내 생산기반 붕괴로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이다" 고 지적했다.

더욱 문제는 꼭 필요한 기술.연구개발 투자나 합리화 투자까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선업체 A사는 올해 고부가가치 선박인 첨단 여객선 개발에 착수할 계획이었으나 최근 없었던 일로 했다.

회사 관계자는 "이 기회를 놓치면 고부가가치 선박제작 부문에서 경쟁국에 뒤지지 않을까 걱정" 이라고 말했다.

간판 산업인 반도체.석유화학 등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 반도체 메이커 관계자는 "대만 기업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메모리 반도체 양산기술 격차를 좁혀오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올해 투자를 지난해보다 40% 가까이 줄여야 한다" 고 탄식했다.

정보망 구축 등 경영합리화 투자는 완전히 실종된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보시스템 통합서비스업체인 ㈜현대정보기술은 최근 기업들의 투자유보 방침이 이어지면서 아예 기업보다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한 세일즈를 벌이기로 하고 사장이 직접 세일즈에 나섰다.

중소기업의 형편은 더 어렵다.

하루 연명하기가 힘겨운 판에 기계 하나를 더 산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다.

자동차 부품을 생산하는 인천 C산업 관계자는 "자동차 경기가 불투명한데다 돈도 없어 지난해부터 추진하던 공장 증설을 포기했다" 고 설명했다.

설비투자가 위축되면서 공작기계.생산설비를 만드는 기계업체들도 빈사지경이다.

제조업의 22%를 차지하는 이들은 수주량이 급격히 줄면서 올들어서만도 두달 동안 6백여개 업체가 부도났다.

또 일부 부도업체들이 만들어 놓은 설비를 고철 값으로 해외로 내다 파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이러다간 국내 산업 기반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 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대우경제연구소 신후식 (申厚植) 팀장은 "당장 뾰족한 대안이 없는 게 문제" 라면서도 "하지만 설비투자 축소는 잠재 성장력을 떨어뜨리고 고용기반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재정과 금융의 탄력적인 운용으로 기업들의 설비투자 의욕을 되살려야 할 것" 이라고 지적했다.

고윤희.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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