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한 중국인의 천안문 기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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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20년이 지난 지금, 그들이 제기했던 부패 문제는 어떻게 됐을까.

국무원(정부) 판공실 왕웨이궁(王維工) 비서장 1293만 위안(약 23억7000만원) 수뢰혐의 사형, 캉후이쥔(康慧軍) 상하이 푸둥(浦東)구 부구청장 599만 위안 수뢰혐의 무기징역, 판훙차이(潘洪才) 산둥성 랴오청(聊城)시 부동산관리국 부국장 1028만 위안 뇌물수수 구속, 허난성 안양(安陽)현 당서기 왕서민(王社民) 700만 위안 수뢰혐의 구속….

최근 중국 언론에 등장한 부패 사례다. 중앙정부에서 시골 현(縣)정부에 이르기까지 부패의 스펙트럼은 넓어지고 있다.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공무원 ‘부패 스토리’가 신문에 실린다. 천 선생은 “부패는 이제 중국인의 생활 방식이 되었다”며 한숨을 내쉰다.

그는 원인을 “1989년 6월 천안문 광장의 정치개혁 열기를 탱크가 깔아뭉갰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당국은 정치적 자유를 줄 수 없으니 경제적 부(富)로 불만을 해소시켜야 했다. 억지로라도 성장률 8%를 달성하려 애썼다. 그러나 부는 도시 부유층·특권층으로 몰릴 뿐 농촌과 도시 저소득층의 상대적 박탈감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권력의 상업화’가 낳은 현상이다. 개혁·개방 초기인 1984년 1.9대 1이었던 도시와 농촌의 소득비율은 지금 3.4대 1로 벌어졌다.

물론 당 지도부가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후진타오(胡錦濤) 체제는 균형성장을 핵심으로 하는 ‘과학발전관’을 추진하고, 부패 근절을 위한 감시 시스템도 운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번 왜곡된 시장은 자가 발전하며 불균형을 키워갔다. 최근의 부패 사례들은 감시 시스템마저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국이 현대화에 성공하려면 시장경제 체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의회민주주의를 시행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중국은 권력의 상업화, 극심한 부정부패, 빈부격차에 시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천안문 사태 때 군 진압에 반대하다 축출된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의 회고록 『국가의 죄인』에 나오는 말이다. 마치 20년 후 상황을 예견한 듯하다.

세계 경제위기와 함께 ‘중국식 성장모델’이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모델은 성장할수록 부패·빈부격차가 심화되는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다. 언제든 성장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수많은 ‘천 선생’들의 움직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한우덕 중국연구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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