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최초 프로기사 조남철 첫 대국보, 일본 국회도서관서 발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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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한국바둑계의 대부이자 한국최초의 프로기사인 조남철 (74) 9단의 생애 첫 대국보가 바둑연구가 안영이 (安令二.) 씨에 의해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

趙9단의 첫 기보는 곧 우리나라 프로바둑계 최초의 기보를 의미한다.

이로서 출발점이 희미했던 한국의 프로바둑사는 제대로 된 첫장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전북 부안출신의 소년 조남철은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 (木谷實) 9단의 내제자가 된다.

그리고 5년후 만17세 때인 1941년 가을 소망했던 프로기사가 되었고 수습기간을 거쳐 1942년부터 공식대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엔 신문기전이라곤 본인방전 하나밖에 없었기에 갓 입단한 초단이 공식대회에 나간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때마침 한 신문사가 '신진쟁패전' 이란 대회를 시작했고 조남철은 여류기사 오히라 쓰나코 (大代津奈子) 초단과 생애 첫 공식대국을 벌여 승리한다.

안영이씨는 이같은 사실을 알아내고 오랫동안 대국보를 수소문하던중 지난 10일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오래전에 폐간된 '국민신문' 에 연재된 기보를 찾아냈다.

12일간 연재된 기보의 첫장에는 '半島의 天才' 라는 제하의 글에 '趙군으로선 효시' 라는 문장이 선명하게 적혀있다.

조남철은 이 대국에 이어 한판을 더 이겼는데 그 대국도 국민신문에 연재되어 있다.

현재 건강이 좋지않아 자택에서 요양중인 조남철9단은 쓰나코초단과의 기보를 보며 "감회가 깊다. 그때 일이 환하게 떠오른다. 내 첫대국이 분명하다." 고 말했다.

소년 조남철은 어려서 부친에게 바둑을 배웠고 기타니 미노루9단과 서울에서 7점 지도바둑을 둔 것이 인연이 되어 일본에 가게된다.

도일후 일본기원 원생으로 들어가 훗날 기성 타이틀을 6연패한 후지사와 슈코 (藤澤秀行) 등과 함께 공부했는데 끝끝내 창씨개명을 하지않고 조남철이란 이름으로 버틴 것도 당시로선 놀라운 기개였다.

43년 귀국한 조남철은 45년11월 서울 남산동에 한성기원 간판을 걸고 바둑보급의 첫발을 내딛는다.

(한국기원은 이때를 우리나라 현대바둑사의 시발점으로 적고 있다) 리어커에 바둑판을 싣고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조선기원, 대한기원으로 이름이 바뀌곤했다.

6.25때는 부산에서 피난기원을 열었고 바둑책이 전무하던 시절 '행마의 기초' 와 '행마의 급소' 라는 명저를 펴내기도 했다.

김인9단이 등장할 때까지 20여년간 그는 1인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렇게 한국바둑의 씨를 뿌리고 길러온 趙9단이지만 현재 그의 대국집은 한권도 없다.

한국기원 정동식 사무국장은 "경제성을 떠나 우리 바둑사를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趙9단의 대국집을 펴낼 생각이었다. 때마침 趙9단의 생애 첫 대국보를 찾았으니 좀더 서두르겠다."

고 밝혔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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