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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또 반려 … 존엄사 막는 벽은 너무 높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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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지난해 12월 30일 서울대병원 의료윤리위원회에 ‘최선의 완화요법에 대한 요청서’가 제출됐다. 혈액종양내과 명의의 요청서엔 “말기암과 에이즈·루게릭·신부전 등 10여 가지 질환을 가진 환자에게 미리 연명치료 거부 의사를 묻는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의료 현장에서 의사의 판단으로 이뤄져온 존엄사를 사실상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위원장인 오병희 부원장과 이윤성(법의학과) 교수 등 윤리위 위원들은 고심에 또 고심을 거듭했다. 그러다 결국 반려했다. 의료 현장에서 이뤄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당위성은 누구나 공감했다. 암뿐 아니라 에이즈·루게릭 말기 환자들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데 위원들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사회적 반향이 두려웠다.

혈액종양내과는 올해 3월 4일 ‘심폐소생술 거부 및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요청서’로 이름을 바꿔 다시 윤리위에 승인을 요청했다. 이번에도 반려됐다. 대상을 말기암으로 한정했지만, 양식에 적힌 문구가 문제였다. ‘대리인으로 지정할 수 있습니다’처럼 애매모호한 문구를 ‘대리인으로 지정합니다’와 같이 명확하게 바꾸라는 주문이다.

이렇게 두 번 반려된 끝에 올 4월 20일 윤리위는 혈액종양내과의 승인요청을 받아들였다. 존엄사 승인을 요청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양식 이름은 ‘심폐소생술 거부 및 연명치료 여부에 대한 사전의료지시서’였다. 현행 의료법상 불법이지만 의료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이뤄져 오던 존엄사를 서울대병원이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이다.

윤리위 이윤성 교수는 “첫 승인 요청 때부터 대상 환자 범위를 둘러싼 윤리위 내 이견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말기암과 달리 루게릭이나 에이즈는 드문 병이라 갑자기 어디서 누가 발목을 잡을지 몰라 (말기암에 한해서만 존엄사를 인정하는)안전한 길을 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승인요청과 반려가 거듭되는 동안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허대석(53·사진) 교수는 애간장이 타들어 갔다. 허 교수는 “20년 가까이 존엄사 허용을 위해 뛰었는데, 손에 잡힐 듯 눈앞까지 왔다가 혹시 좌절될까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1991년 말기 암환자와 가족에게 ‘품위 있는 죽음’을 주제로 존엄사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 그러다 97년 보라매병원 의사가 살인죄로 기소되자 본격적으로 존엄사 연구를 시작했다. 2006년엔 서울대병원 의사가 살인죄로 고소되는 일을 목격하기도 했다.

허 교수는 “처음엔 포괄적으로 존엄사를 허용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우리 사회가 수용하기 어려울 것 같아 전략을 수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보라매병원과 대법원 판결을 앞둔 세브란스병원 사건에서 보듯 아무리 존엄사가 의료 현장에서 관행적으로 묵인돼 왔어도 원칙이 없으면 병원에 엄청난 부담으로 돌아온다”고 덧붙였다. 병원의 소송 위험을 덜고, 행정적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존엄사를 공식화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국립암센터 윤영호 기획조정실장은 “암을 치료하는 의사가 호스피스 운동에 뛰어든다는 건 지금도 하기 힘든 일”이라며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는 “허 교수는 불필요한 고통 연장이 옳지 않다는 신념 하나로 존엄사에 정진해 왔다”고 덧붙였다.

올해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 존엄사를 바라보는 사회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연명치료 중단은 사회의 윤리규범을 뒤흔드는 발상이었다. 허 교수의 18년간의 노력이 의료윤리의 개념을 다시 정립하게 했다.

황세희·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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