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윌슨 뮤지컬 '블랙라이더'…상상력의 극치 선보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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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마술.신비.상상.괴기.환상.코믹.위트.사랑.죽음 - . 로버트 윌슨 연출의 뮤지컬 '블랙 라이더 (The Black Rider.黑騎士)' 는 이같은 단어들의 집합체다.

마치 이어폰을 끼고 한편의 3D (입체) 영화을 보듯 시청각적 스텍터클이 참으로 뛰어나다.

춤과 노래 등 가벼운 소재들을 잘 버무려 '잡탕쇼' 처럼 만든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비교해 로버트 윌슨의 뮤지컬은 전혀 다른 극단에 서 있다.

'뮤지컬의 이단아' 란 수식어는 한 예술 혁명가에 대한 모독이자 동시에 최고의 찬사이기도 하다.

그가 연출한 전설의 3부작 ( '블랙 라이더' '앨리스' '타임 로커' ) 중 첫번째 작품인 '블랙 라이더' 가 홍콩아츠페스티벌에 초청돼 지난 10~16일 홍콩연예학원가극원에서 아시아 초연됐다.

첫 만남에 대한 홍콩의 반응은 무척 신중한 편. 생경한 스타일과 독일어 내용 때문에 "관객들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사우스차이나 모닝 포스트) 는 등 다소 부정적인 평이 우세. 그러나 이런 평을 비웃듯 '블랙 라이더' 는 페스티벌 참가작중 관객들의 최고 관심작이었다.

'블랙 라이더' 는 로버트 윌슨 (연출.무대 조명디자인).톰 웨이츠 (작곡.작사).윌리엄 버로스 (대본) 등 미국출신 예술가 세사람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19세기 초자연적인 독일 민속 전설을 소재로 한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 (Der Freischtz)' 가 원작. 옛 독일의 전설에는 사격의 명수가 되기 위해 악마의 힘을 빌리는 자가 있었다.

'블랙 라이더' 는 이런 전설을 두 청춘남녀의 사랑이야기로 바꿨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 식 비련의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주인공 빌헬름이 백발백중하는 마법의 탄환 (magic bullets) 을 입수, 아버지 (베르트람) 의 반대를 무릅쓰고 애인 카트헨과의 사랑을 이룰 찰나 악마의 농간으로 그 총알은 카트헨의 가슴에 꽂힌다.

'블랙 라이더' 는 프롤로그부터 을씨년스럽다.

하얗게 분칠한 얼굴, 검은 두 눈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악마가 육중한 관속에서 부스스 등장, 오싹하게 만든다.

이어 거의 같은 모습으로 빌헬름.카트헨.베르트람이 등장한다.

"악마와 내기를 하지 마라!" 액자속 빌헬름 삼촌이 객석을 향해 던지는 이같은 경고는 드라마 전편을 예고하는 복선이 된다.

이같은 플롯에 알맞게 '블랙 라이더' 의 음악과 의상, 무대 분위기는 시종 신비스럽다.

배우들의 움직임은 한편의 무언극처럼 사뿐사뿐 가볍고 날렵하다.

잉크를 뿌려놓은 듯한 검은색과 흰색.붉은색 의상의 대비, 여기에 조명을 받아 쏟아져 내리는 블루컬러의 색감이 보태져 괴기스런 분위기를 연출한다.

톰 웨이츠의 음악은 왈츠와 블루스.팝과 재즈를 오가며 자유분방했다.

'블랙 라이더' 는 1백55년 전통의 독일 탈리아 극장 (함부르크 소재) 제작으로 90년에 세계 초연됐다.

이제는 홈 무대 (1백70여회) 뿐 아니라 유럽.미국등 세계 곳곳을 돌며 화제를 뿌리는 독일식 뮤지컬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지난 16일 이 작품을 본 배우 최형인 (한양대 교수) 은 "연출자의 머리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상상력이 기발했다" 고 평했다.

미국 텍사스 출신 연출가인 로버트 윌슨은 지난 75년 연극 '해변위의 아인슈타인' 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았으며 올 3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 으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를 앞두고 있는 뮤지컬.오페라 연출의 귀재. 국내 연출가들의 '이상형' 이기도 하다.

홍콩 =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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