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박물관 지자체 이관 토양조성 안돼 시기상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정권교체를 코앞에 두고 정부조직개편위원회가 문화관광부의 '소속기관별 감축계획' 을 내놓았다.

이 계획에 의하면 새 정부는 10개의 국립박물관 중에서 서울의 중앙박물관을 제외한 나머지 지방소재 9개의 국립박물관을 모두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이관하고 인원도 대폭 감축할 예정이라고 한다.

새 정부 하에서는 문화가 제 역할을 다하게 되고 크게 발전하리라고 기대하던 터라 문화재전문가들이나 박물관 관계자들은 모두 놀라고 실망하고 있다.

지방자치제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문화의 지방화를 촉진해야 할 시점임을 감안하면 지방에 있는 국립박물관들을 해당 지역 자치기관에 이관하는 일은 한번쯤 당연히 생각해 봄직하다. 명분상 하자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어찌 보면 지역에 따라서는 행정기관이나 주민의 환영을 받을 수도 있고 그들의 애정에 힘입어 국립박물관보다도 도립이나 시립 박물관으로 탈바꿈하여 더 발전하게 될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낙관적인 가정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국립박물관들의 지방 이관에 대하여 근심을 털어내지 못한다. 그들이 걱정을 사서 하는걸까. 아니다.

생각은 그럴 듯해도 현실과는 너무나 괴리가 크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의 지방자치단체 이관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도 단체장을 비롯하여 지방행정기관과 지역 주민의 절대적인 지원과 후원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각급 박물관들이 심하게 겪고 있는 '3부족 현상' (예산. 시설. 전문 인력) 을 개선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것이 지방에서 당장 가능할까. 먼 훗날 주민이나 행정 책임자들의 문화인식이 한껏 높아지고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이 말끔히 제거될 때까지는 전혀 기대 난망이라고 본다.

잘 알려져 있듯이 대다수의 지방자치단체들은 재정 자립도가 지극히 낮으며 박물관에 대한 주민의 인식 역시 높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국가의 지원 없이는 현재 국립박물관 수준의 운영조차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 뻔하다. 설령 이러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다 하더라도 국립박물관의 지방 이관이 불러올 또 다른 문제점이 적지 않다.

발굴된 방대한 매장문화재의 합리적인 분산처리, 전란 등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문화재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비상관리, 중앙과 지방간의 원활한 인적교류와 활발한 교환전시, 박물관을 활용한 관광산업의 진흥과 대외홍보 등이 모두 벽에 부딪히거나 어려워질 것이다. 이처럼 지방 소재 국립박물관들을 지방자치단체로 이관하는 것은 지금처럼 모든 조건이 열악한 상황에서는 아직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IMF시대를 맞이하여 모든 정부기구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편하는 것은 꼭 필요하다.

국립 문화기관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개편은 반드시 현실을 바탕으로 해서 개선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하며 발전지향적.미래지향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박물관 등 국립 문화기관들의 개편은 당연히 국가적 필요성과 전문적 특수성을 충분히 고려하여 실시해야 옳다. 혹시라도 전문적 판단을 요하는 중요한 사안들이 비전문적으로 처리되거나 시행착오를 범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21세기를 열게 될 새 정부는 창의성 고양.전문성 중시.문화의 애호를 통하여 문화입국의 위업을 달성해 주기를 빈다. 그것을 위해 침체되어 있는 문화기관들의 활성화와 올바른 발전방안의 수립,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지원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안휘준<서울대교수 고고미술사학>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