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만에 지킨 ‘에베레스트의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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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엄홍길(49)씨가 네팔의 오지 마을 ‘팡보체’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초등학교’를 짓는다. 팡보체는 히말라야 산맥 해발 3950m에 위치한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로 가는 관문이다. 엄씨는 어린이날인 지난 5일 현지에서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산악인 엄홍길씨가 5일 네팔의 오지 마을 ‘팡보체’에서 초등학교 기공식을 했다. 팡보체 마을 어린이들과 한국인 후원자들이 함께했다. 가운데 파란색 점퍼를 입은 사람이 엄씨. 뒤에 보이는 건물은 원래 있던 40년 된 학교로 곧 철거된다. 내년 초 같은 자리에 새 초등학교 건물이 들어선다. [엄홍길 휴먼재단 제공]


엄씨가 이곳에 초등학교를 짓게 된 것은 23년 전의 약속 때문이다. 1986년 두 번째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선 그는 네팔인 셰르파 두 명과 함께 산을 올랐다. 85년 기상악화로 한 차례 실패를 맛본 뒤였다. 정상을 눈앞에 둔 캠프 4(해발 760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급한 무전이 들어왔다. 식량을 지고 올라오기 위해 엄씨보다 뒤에 오던 셰르파였다. 술딤 도르지라는 셰르파가 추락사했다는 비보였다. 엄씨는 그 자리에서 등반을 포기하고 절벽을 내려왔다. “하얗게 눈이 덮인 절벽에 뿌려진 핏자국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간신히 내려왔습니다. 등반 중에 처음으로 동료를 잃은 것이죠.” 절벽 바닥에 크레바스(빙하 속에 생긴 균열)가 있었던 탓에 시신도 찾을 수 없었다.

팡보체는 죽은 셰르파가 살던 고향 마을이었다. 당시 그는 결혼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신혼이었다. 아내와 노모, 어린 여동생을 부양하려고 셰르파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산에서 내려온 엄씨는 오열하는 유가족을 마주해야 했다. 안타까움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엄씨는 “그때의 충격으로 히말라야를 완전히 잊으려 했다”고 털어놨다.

그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유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엄씨는 그때부터 홀로 된 셰르파의 부인과 가족을 돌보기 시작했다. “등반 중에 도르지 셰르파가 ‘마을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 없어 배우고 싶어도 공부를 할 수 없다’고 한탄을 했었죠. 유가족을 만나러 마을에 가보니 정말 다 허물어져 가는 학교 건물만 덩그러니 서 있었습니다. 국립학교지만 정부에서 월급을 제때 주지 않아 선생님도 한 명 없었습니다. 그때 언젠가는 꼭 이 마을에 반듯한 초등학교를 선물하겠다고 다짐했지요.” 엄씨는 셰르파의 가족을 돌보며 잊었던 히말라야에 다시 도전했다. 그리고 2년 뒤인 88년 에베레스트 정복에 성공했다.

그때의 다짐이 23년 만에 현실이 됐다. 4개의 교실, 도서실과 화장실, 보건실이 갖춰진 현대식 건물과 운동장을 대신할 강당이 딸린 팡보체 초등학교는 내년 초 완공된다. 교사와 간호사 한 명을 뽑아 네팔 정부를 대신해 월급도 지급하기로 했다. 50여 명의 마을 어린이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뛰놀 수 있게 된다. 엄씨는 “기공식 전날까지 비바람이 심하게 불었는데 당일에는 감쪽같이 개 맑고 청명한 날씨 속에서 행사를 잘 치렀다”며 “도르지 셰르파가 도와주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고 말했다.

마을이 고산 지대에 위치한 만큼 학교 건축공사는 쉽지 않다. 공사에 쓰일 자재와 장비를 헬리콥터로 해발 3500m에 위치한 마을까지 1차 수송한 뒤 야크(고산 지대에서 물자 수송에 쓰이는 소과 동물)와 사람이 직접 현장까지 날라야 하기 때문이다.

공사비용도 애초 예상보다 훨씬 많은 15만 달러 이상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십시일반 모인 후원금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엄씨는 “기공식 도중 한 여학생이 ‘우리 마을의 꿈과 소망을 이뤄줘 고맙다’며 울먹이는 모습을 보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이에스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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