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계 아라이 의원 체포 수시간전 자살 충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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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검찰의 체포를 몇시간 앞두고 자살한 한국계 아라이 쇼케이 (新井將敬.50.자민당) 의원은 지난주부터 사면초가에 빠졌다.

인맥과 조직이 우선되는 일본 사회에서 완전히 외톨이가 된 그는 결국 죽음을 택했다.

도쿄지검 특수부는 닛코 (日興) 증권의 차명계좌에서 일임매매로 4천90만엔의 부당이익을 올렸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들이밀며 구속수사를 위해 한발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야당의원들은 국회 발언에서 의원직을 사퇴하라고 몰아붙였고 자민당조차 탈당을 요구했다.

아라이는 "아직 유죄가 확정되지 않았다" 고 버텼으나 침묵을 지켜오던 증권사 간부들이 검찰조사에서 "아라이가 일임매매를 통해 꼭 이익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고 잇따라 진술하면서 결정타를 맞았다.

아라이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은 '헤이세이 (平成) 의 료마 (龍馬)' .메이지 (明治) 시대의 청렴한 개혁가인 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와 자신의 '클린' 이미지를 연결하기를 좋아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일본의 금권정치에 맹공을 퍼부었다.

93년 가네마루 신 (金丸信) 전 자민당부총재의 탈세사건 때에는 "정치가가 정치적 생명 대신 돈을 좇는 것이 일본 정치를 망친 가장 큰 이유" 라고 몰아붙였다.

그러나 검찰수사에서 증권거래법 위반이라는 추악한 이면 (裏面) 이 드러나면서 그의 정치적 생명은 사실상 끝났다.

한국의 피 (血) 를 이어받았지만 결국 자살한 그의 마지막 선택은 다분히 일본적이다.

아라이의 자살에 대해 일본 사회는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는 모습이다.

아라이는 도쿄대 경제학부를 졸업한 수재였지만 1년동안 신일본제철에 들어가 용광로 앞에서 육체노동을 자원, 이색적인 사회출발을 시작했다.

대장성 관료가 된 그가 주목받은 계기는 와타나베 미치오 (渡邊美智雄.작고) 당시 대장상의 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부터. 와타나베의 주선으로 86년 중의원에 첫 당선된 뒤 한국계라는 주위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내리 4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운명은 94년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면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96년 도쿄4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자민당 공천을 받은 6선의 거물을 누르고 4선의원이 되면서 다시 주목을 받았다.

여당이 된 자민당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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