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통령을 위한 제언]4.끝 직언 막으면 불행 싹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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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공 (共) 의 강압과 국민저항이 정면으로 충돌하던 87년 6월11일 밤 서울 명동성당. 1천여명의 시위대속에는 김용갑 (金容甲) 청와대민정수석이 끼여 있었다.

점퍼차림의 그는 그 순간부터 직선제론자가 됐다.

그는 18일 아침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앞에 앉았다.

"각하, 민심을 확인해보니 직선제밖에는 난국을 풀 길이 없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30여분간 金수석의 '연의 강압과 국민저항이 정면으로 충돌하던 87년 6월11일 밤 서울 명동성당. 1천여명의 시위대속에는 김용갑 (金容甲) 청와대민정수석이 끼어 있었다.

점퍼차림의 그는 그 순간부터 직선제론자가 됐다.

그는 18일 아침 전두환 (全斗煥) 대통령앞에 앉았다.

"각하, 민심을 확인해보니 직선제밖에는 난국을 풀 길이 없습니다.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30여분간 金수석의 '연설' 을 들은 全대통령의 얼굴엔 차츰 자신감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봐 金수석, 나는 알아들었으니까 노태우 (盧泰愚) 대표 (당시 민정당) 한테 얘기 좀 해봐. " '4.13 호헌' 이란 全대통령의 고래힘줄 고집이 직선제로 바뀌고 역사는 6.29로 내달렸다.

한국의 대통령사 (史)에서 직언은 항상 미완 (未完) 의 과제였다.

한 정권이 지나면 늘 "그걸 직언했더라면…" "그 직언을 들었더라면…" 이라는 안타까운 가정 (假定) 이 따라 붙곤했다.

소산 (小山.金賢哲씨) 의 위세가 더욱 등등해가던 94년 7월 어느날 저녁. 박상범 (朴相範) 경호실장은 현철씨와 김기섭 (金己燮) 안기부 기조실장.장학로 (張學魯) 청와대 1부속실장 등과 한정식집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다 언쟁이 붙었고, 朴실장은 현철씨에게 "지금 여론이 어떤 줄 아느냐. 그런 식으로 하다간 나중에 청문회에 서게 된다.

조심해야 한다" 고 충고했다.

朴실장은 며칠후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에게 불려갔다.

金대통령은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왜 그렇게 쓸데 없는 얘기를 하느냐" 고 질책했다.

朴실장은 "각하, 그것은 문민정부의 도덕성을 위협하는 문제입니다.

지금 잘 처리하지 않으면 국정수행에 큰 걸림돌이 됩니다" 라고 조심스럽게 간언 (諫言) 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자 金대통령의 얼굴은 입술주변이 굳어지며 싸늘하게 변했다고 한다.

朴실장은 이후 대통령과 새벽 조깅을 함께 하며 현철씨 및 그를 둘러싼 '청와대내 홍위병' 의 문제점을 적시했으나 마찬가지였다.

"현철씨 문제를 꺼내면 앞으로는 기자회견도 않겠다" 고 한 바 있는 金대통령에게 먹힐 얘기가 아니었다.

박관용 (朴寬用) 비서실장도 93년 9월 金대통령에게 "현철씨가 국정에서 손을 떼게 해야합니다" 라고 건의했다가 현철씨에게 당한 적이 있다.

두 朴실장은 94년 12월 물러나게 된다.

金대통령은 왜 그토록 직언에 귀를 닫았을까. 특히 정치라든가, 아들에 대한 얘기는 "내가 박사" 라는 의식으로 마음을 닫았다는 분석이다.

그를 가까이서 보좌한 Q씨의 설명. "지도자에게는 모략 또는 사실과 틀린 얘기들이 올라가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말하는 사람이 이해관계를 계산하는 거죠. 金대통령은 야당정치인때부터 이를 알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부하의 말을 가려 듣는 거예요. 金대통령이 옳을 땐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으면…. " 金대통령은 얘기가 듣기 싫으면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곤 했다.

일단 그의 고개가 돌아가면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어느 정권에서건 대통령 주변, 특히 가족에 관한 진언은 가장 까다롭고 휘발성이 강한 부분이었다.

부하의 직언을 폭넓게 수용했으며 친인척에게 엄격했던 박정희 (朴正熙) 대통령도 맏딸 근혜 (槿惠) 씨 문제에 대해선 인간적 한계를 보였다.

하지만 처리방식에선 후임자들과 구별되는 치밀함이 있었다.

朴정권 말기에 핵심참모들은 근혜씨와 최태민 (崔太敏) 총재의 구국여성봉사단을 둘러싼 좋지 않은 소문을 무척 걱정했다.

崔씨가 권력을 업고 비리에 개입한다는 혐의였다.

김재규 (金載圭) 중앙정보부장은 77년 여름 백광현 (白光鉉) 안전국장을 시켜 이를 수사한 후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朴대통령은 근혜씨와 崔총재, 그리고 金부장을 집무실로 불렀다.

친국 (親鞫) 이 벌어진 것이다.

근혜씨는 "아버지께서는 조목조목 짚어가며 물으셨어요. 崔씨는 나름대로 해명했는데 金부장은 제대로 대답을 못했지요. 아버지께서는 결국 '없던 일로 하라' 고 끝내셨어요" 라고 회고했다.

박승규 (朴承圭) 당시 민정수석도 朴대통령에게 崔총재에 대한 제재를 직언했다.

朴대통령은 결국 수용하지 못했고, 이 일은 그의 통치과오로 남아있다.

대통령직선제 직언을 받아들였던 全대통령은 동생 경환 (敬煥) 씨를 비롯한 친인척문제에 대해선 판단이 흐렸고 의지가 약했다.

盧대통령도 처조카 박철언 (朴哲彦) 씨에 대한 부하들의 직언을 외면했다고 한다.

심지어 朴씨의 문제점을 적시한 직보 (直報) 문건을 朴씨에게 던져줘 보고자를 무색하게 했다는 전언이다.

6공장관 K씨의 기억. "초기에 朴정책보좌관이 월권하자 다른 청와대참모들의 불만이 컸습니다.

내가 盧대통령에게 그런 사정을 진언했지요. 盧대통령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장관이 잘 모르고 하는 소리요' 라고 잘랐습니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는 남의 얘기를 경청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朴대통령 만큼이나 '토론형' 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벌써 "권력인수의 민감한 시기여서인지 가끔 직언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인다" 는 걱정이 주변에서 나온다.

작고한 김옥길 (金玉吉) 전 문교장관은 "대학총장 (梨大) 때는 싫은 소리도 잘 들었는데 장관이 되니까 역시 달콤한 얘기가 좋더라" 고 고백한 적이 있다.

고언 (苦言) 을 귀담아 듣느냐 여부가 새 정부의 진운을 결정할 것이라는 말이 과언은 아닐 것이다.

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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