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은의 세상풍경]반도의 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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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누군가 칼바람.얼음장을 뚫고 달려와 말하더이다.

희미한 기운을 봤는데 봄을 닮았더라고. 하지만 아무도 가슴 설렐 요량이 아니었다네. 더 잔인하게 다가설 계절에 대한 근심의 눈초리뿐. 1998년, 그리고 - .

봄은 링거병 속에 갇혀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네. 5%짜리 아지랑이로 몇겹으로 쌓인 절망을 어찌 걷어낼 건지. 언땅에 나뒹굴었던 목숨일랑 또 어떡하고. 결국 봄은 링거액에서 자맥질.무자맥질을 거듭하다가 말라 비틀어지고 말지 모를 일이라네. 절대 심각하지 마세나. 우리의 가슴 속에는 온갖 상처가 얼룩져 있지 않은가.

마치 액체가 이리저리 움직이고 다니는 현상, 즉 '유동 (流動) 의 기억 (fluid memory)' 같은 것이지. 가난이라고 해도 좋고 아픔이라 불러도 괜찮을 거야. 봄은 병든 분단의 땅을 그냥 버려두진 않을 것. 터무니없는 믿음이라고 몰아세워도 좋다네. 한번 돌아서 보게. 반쯤 저문, 여러 갈래 길. 한자락 숨결만 붙들고라도 어디론가 경쾌하게 떠날 것 같지 않은가. 그것이라네.

그림 = 최재은 〈명지대 산업디자인학과 교수〉

글 = 허의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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