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행의 옴부즈맨칼럼]'新五賊'은 '盜'와 '賊' 혼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한자에서 '도 (盜)' 와 '적 (賊)' 은 도둑을 뜻하는 글자이긴 하지만 그 격 (格) 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일컬어진다.

어원 (語源) 을 살펴 보면 '도' 라는 글자는 침을 뜻하는 연 (연) 자 아래에 그릇을 뜻하는 명 (皿) 자를 밑받쳐 만든 것이다.

그릇 (皿)에 담긴 음식을 보고 침 (沈) 을 삼키다가 몰래 집어 먹는다는 연유에서 '도둑' 의 뜻으로 쓰인 게 바로 '도' 라는 글자다.

이에 비해 '적' 이라는 글자는 조개를 뜻하는 패 (貝) 자 옆에 무기를 뜻하는 융 (戎) 자를 덧붙여 만든 것이다.

'패' 라는 글자는 예부터 화폐 또는 재물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적' 이라는 글자는 권력 또는 흉기 (戎) 를 갖고 남의 재물 (貝) 을 빼앗거나 훔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일찍이 시인 김지하 (金芝河)가 읊은 오적 (五賊) 이란 시는 도둑의 개념을 제대로 잡고 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적' 시에서는 국회의원, 장.차관, 재벌, 장성, 고급공무원을 오적으로 지목했거니와 당시의 시대상황과 맞물려 엄청난 파문을 일으킨 바 있었다.

이에 비해 김태동 (金泰東) 교수의 '신오적' 이란 시는 그토록 파문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다.

정의감과 재기 (才氣)가 넘치는 소장학자가 김지하를 흉내냈다고 해서 화제가 됐을 따름이었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신오적' 이란 시에서는 '적' 과 '도' 를 혼동하고 있는데도 구태여 꼬집어 문제삼은 일조차 없었다 金교수는 신오적으로 언도 (言盜.언론).환도 (環盜.공해범).지도 (地盜.부동산투기꾼).공도 (公盜.공무원).법도 (法盜.판 - 검 - 변호사) 를 지목했다.

그것은 도둑이란 통념엔 맞을는지 모르지만 전혀 글자의 격에는 맞지 않는 표현이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 뒤의 글에서도 재벌을 일컬어 재도 (財盜) 라고 표현한 것은 같은 줄기의 생각과 앎을 표출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그가 청와대경제수석으로 내정되자 단연 관심과 화제의 초점이 그에게 모였고 그것을 놓칠세라 매스컴이 그의 '신오적' 시와 글들을 소개했다.

이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매스컴의 편집 내지 보도자세를 문제삼는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나는 기술적 측면을 제외한다면 매스컴의 보도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내가 기술적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까닭은 우리나라의 유수한 신문들이 金교수의 생각이나 글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게재됐던 신문의 이름을 명백히 밝히지 않고 '모신문' 'H신문' 또는 'S일보' 라고만 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보도자세는 좋게 말해 기술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나라 매스컴의 체질 (體質) 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사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매스컴은 동업자의 특종뉴스를 인용하거나 고유사업을 뉴스로 다루는 데 너무 인색했다.

반면 동업자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에는 직.간접으로 발벗고 나섬으로써 오히려 독자의 빈축을 사기 일쑤였다고 지적되고 있다.

이런 따위의 태도나 자세는 마땅히 지양돼야 하리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고서는 성숙된 언론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할 수 없다는 인식이 있어야 할 줄 안다.

광범위한 정치사회적인 병리 (病理) 현상을 일컬어 '오적' 또는 '신오적' 등으로 이름짓는 사례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중국에서도 한동안 '오비 (五匪)' 란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나는 '오비' 에서 동양적인 사고방식과 병리현상의 어떤 틀 같은 것을 느끼고 있거니와 '오비' 를 찬찬히 뜯어보면 '오적' 의 원형적인 성격이 더욱 선명해진다고 말하고 싶다.

'비 (匪)' 라는 한자는 역시 도둑을 뜻하는 것인데 그것은 '도' 같은 좀도둑이 아닌 '적' 차원의 도둑, 또는 떼도둑을 지칭하는 것이다.

'오비' 는 병비 (兵匪).관비 (官匪).정비 (政匪).학비 (學匪).토비 (土匪) 인데 여기서 '병비' 는 김지하가 지목한 군장성에 해당하는 것이고 '관비' 는 장.차관과 고급공무원, 그리고 '정비' 는 국회의원 등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金교수가 지목한 '공도' 나 '법도' 의 '도' 자는 '적' 자나 '비' 자로 바꿔야 옳을 터이고, 그런 것들이 모두 '관비' 의 테두리에 속하는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김지하와 김태동 두사람이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게 이른바 '학비' 와 '토비' 다.

'토비' 란 마적 (馬賊) 또는 지방의 떼도둑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비' 란 애국 (愛國) 과 구국 (救國) 을 명분으로 내세우고 나쁜 짓 하는 지식인, 또는 학자를 지목하는 것인데 이런 범주에 속하는 지식인이나 학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언론인도 지식인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비' 의 테두리에 '언도' 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사실 언론이 '언도' 로 지목되는 상황에선 '학비' 뿐만 아니라 '관비' 나 '정비' 조차도 '언론' 을 도둑이라고 몰아세울 개연성을 지니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안팎에서 지적되고 있는 문제들을 애써 간과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그런 상황일수록 언론의 자정 (自淨) 과 올바른 자세정립이야말로 더욱 절박한 과제라고 강조해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문득 도둑의 눈에는 도둑만 보이고 성인 (聖人) 의 눈에는 도둑조차 성인으로 보인다는 옛말이 머리에 떠오른다.

이규행〈언론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