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세상보기]신학문 IMF사회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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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인도네시아에서 물가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정말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쪽이나 이쪽이나 IMF 구제금융에 의존하고 있는 처지는 같다.

우리보다 병을 심하게 앓나보다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처지를 돌아보게 된다.

어렴풋이 짐작만 되던 외환위기의 성격이 직장을 잃고 물가가 오르고 생필품을 사기가 어렵게 되면 분명히 알게 된다.

그렇군, IMF사태가 무엇인가 했더니 바로 내 생활.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로군. 그래서 폭동이 일어나고 자살이 늘고 기르던 개.고양이도 버리게 되나보다.

그러니 어찌 IMF 경제학이나 IMF 언어학만 공부하겠는가.

사회변동 이론을 설명하는 IMF 사회학도 이참에 공부해 둬야 한다.

IMF시대의 개막이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일으킨 반응은?

1단계. 공포와 분노

한국이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는 소식이 몰고온 첫번째 반응은 바로 공포와 분노다.

국가부도가 염려되는 데서 오는 공포, 경제주권을 유보당한 데 대한 분노. 국가경제나 가정경제가 모두 파탄에 이를 것 같다는 공포,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는 자존심이 일거에 무너졌는데도 사전에 손을 쓰지 못했다는 분노. 그때 한국인의 가슴에 자리잡은 것은 이 두가지밖에 없었다.

이때의 화두 (話頭) 는 '의문' ,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런 시련이 우리에게 닥쳤습니까.”

2단계. 체념과 긍정

한바탕 놀란 가슴이 진정되자 한국인들은 이런 시련이 닥쳐온 원인을 분석하고 도저히 이 시련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찾아온 것이 체념과 긍정. 한국 경제의 구조개혁은 IMF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우리가 하려던 것이라는 체념, 타율적으로라도 그 개혁을 거쳐야 한국 경제의 경쟁력이 되살아난다는 긍정. 이때의 화두는 '반성' , “이 시련은 우리의 잘못 때문입니다.”

3단계. 예찬과 맹세

국가부도의 위기를 한고비 넘기면서 한국인에게 찾아온 것은 찬양과 맹세. 우리 혼자 힘으론 도저히 해낼 수 없었던 경제.사회개혁이 IMF사태를 맞아 해결의 기미가 보이는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이제 다시 한번 한국인의 저력을 보이자. 겨울을 견뎌야 봄이 아름답다는 찬양, 전화위복 (轉禍爲福) 의 계기로 삼자는 맹세. 이때의 화두는 '의욕' , “이런 시련을 내려 주신 하늘에 감사드립니다.”

□ 이 3단계 반응은 하나가 사라지면 하나가 오는 식이 아니고 3단계가 모두 중첩되면서 때에 따라 어느 한 단계가 특별히 강조되는 것이 특색이다.

가령 1단계의 화두인 '의문' 을 풀기 위해 아직도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과 책임소재를 밝히려는 노력이 진행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래서 그런지 평면적인 단계별 진화와 순치 (馴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1단계때의 경악과 당황을 나타내는 '씨근벌떡' 과 '어리둥절' 이란 또다른 특색이 악착같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이때는 화두가 등장하지 않고 북한식 유머가 등장한다.

“급하게 만든 떡은 헐레벌떡, 어렵게 지은 절은 우여곡절.” “IMF시대에 만든 떡은 씨근벌떡, IMF시대에 지은 절은 어리둥절.” 우울증과 불면증이 괜히 생기는 게 아님을 이제 알 수 있다.

IMF사회학이 의문에서 반성으로 발전하고 다시 의욕으로 승화한다고 해도 어엿한 신학문으로 자리잡으려면 이 떡과 절의 유래를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노래하는가 보다.

“IMF 땅에는 희망도 기쁨도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구나.”

김성호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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